
우리의 생을 뒤바꿔버린 사건이나 시간들을 통틀어 떠올려보면 그때는 보지 못했던 징후들이 마치 영화의 티저 영상처럼 삶의 거리 여기저기에 깔려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살갗에 닿는 바람결로 봄을 느끼기 전에 이미 여기저기서 조그만 들꽃의 싹이 피어나고 뜻밖에도 양지쪽에 보랏빛 제비꽃이 피어난 걸 보게 되듯이. 몸이 봄을 느끼기 전에 봄의 징후들이 도착하듯이.
그 징후들이 가지고 온 사명의 기호가 해독되는 것은 이미 사건이 종료되고 나서이거나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때라는 것이 삶의 비극이었다. 모든 일이 끝나고 난 후에 다시 돌아보면 삶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스포트라이트는 늘 우리가 그렇다고 믿었던 그곳 말고 엉뚱한 곳을 비추고 있었다. - 1부 제 영혼이 밀랍처럼, 7장 중에서
“사랑했나보다. 아직도 사랑하고.”
내가 문득 웃자 안젤로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말했다.
“왜요? 사랑하니까 여기까지 찾아오고 사랑하니까 아직까지 기다리는 거겠죠. 내 마음이 아파요. 아무리 남이 보기에 하찮은 것이라 해도 사랑은 아픈 거잖아요.”
안젤로는 창밖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서쪽 하늘 저쪽으로 천사의 깃털 같은 구름이 퍼져 있고 그 사이로 생채기처럼 노을이 빨갰다. 안젤로가 말한 사랑이라는 말 때문이었을까. 내 마음은 소희를 보냈던 수도원의 다섯 번째 담벼락을 더듬고 있었다.
“어떤 이유든 사랑은 아프고, 그래서 하느님도 늘 아프세요. 하느님은 사랑하니까요. 난 노을을 보면 그게 상처 난 하느님의 섬세한 마음인 거 같아서 덩달아 마음이 아파요.”
그때 종이 울렸다. 저녁 식사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 1부 제 영혼이 밀랍처럼, 58장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