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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의 말
노인과 바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 관한 깊은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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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책소개

알라딘제공
‘불굴의 의지’ 아닌 ‘인간 한계’에 관한 소설
우리는 <노인과 바다>를 깊이 오해하고 있다!


50대 중반의 어니스트 헤밍웨이에게 퓰리처상(1953년)과 노벨문학상(1954)을 연이어 안긴 <노인과 바다>. 이 간결하고 압축적인 소설을 헤밍웨이의 최고 작품, 20세기 문학의 백미로 꼽는 데 토를 다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입을 모아 거대한 물고기와 사투를 벌이는 늙은 어부의 ‘불굴의 의지’를 감동의 포인트로 얘기한다. 그런데 <노인과 바다>의 감동은 과연 노인의 ‘불굴의 의지’로부터 오는 걸까?

작품 속 노인은 단지 용감한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겸손하고 우아하게 당당하며, 훌륭한 것을 의식하고 자연과 한 핏줄이라는 의식에 가득 차 있다. 또한 사랑하는 마음을 지녔다. 이런 특성들은 이전 헤밍웨이의 캐릭터들에서 흔한 게 아니었다. 그것들은 감탄할 만했고 헤밍웨이는 그것들에 감복하였으므로, <노인과 바다>의 도덕적 풍토는 신선할 정도로 건강하고, 노인의 시련은 감동적이다.
_뉴욕타임스, 1952년 8월 28일 서평

<노인과 바다>가 《라이프 매거진》을 통해 처음 공개된 직후의 서평이다. 당대의 평론가는 노인의 용감함을 넘어 ‘겸손’과 ‘자연과 한 핏줄이라는 의식’ 나아가 ‘도덕적 풍토’를 강조한다. 막 베일을 벗은 헤밍웨이의 소설이 선사한 감동은, 아무래도 ‘불굴의 의지’에서만 비롯했던 것 같지는 않다. 새로 출간된 <노인과 바다>(이정서 옮김)의 역자 역시 이렇게 말한다.

<노인과 바다>는 오히려 자연에게 패배하는 인간의 한계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와중에 오히려 잡아 죽여야 할 적이라 해도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해 주는 데 인간의 위대함이 있다고, 헤밍웨이는 시적인 문장으로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세계인이 감동하고 100년이 지난 지금도 환호하는 것일 테구요.
_역자의 말 중에서

자연에 대한 겸허, 인간의 한계 그리고 적에 대한 배려와 존중……. <노인과 바다>가 함축하는 메시지는 복합적이고 심층적이다. 그러나 출간 후 수십 년이 지나면서 작가의 본래 의도는 상당 부분이 사라졌다. 헤밍웨이의 최고 걸작 <노인과 바다>에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혹시 번역의 과정에서 노인의 캐릭터에 왜곡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명료하지 못한 번역, 자의적인 의역, 그리고 맥락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오역이 작품 전체의 성격을 바꾼 것은 아닐까?

소년(boy) 마놀린은 과연 ‘어린 소년’일까?

잘못된 번역이 어떤 문제를 야기하는지 극명하게 보여 주는 사례가 작품 속 ‘boy’ 마놀린에 관한 오해다. 기존의 번역을 읽은 독자들은 ‘소년’의 나이를 열한두 살쯤으로 추정하고 만다. 그러나 헤밍웨이가 노인과 소년의 대화를 통해 언급하고 있는 소년의 캐릭터는 우리의 이해와 사뭇 다르다.

“위대한 시슬러 선수의 아버지는 결코 가난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는…, 그 아버지는, 제 나이 때 빅 리그에서 경기를 했어요.”
“네 나이 때 나는 아프리카로 달려가는 가로돛을 단 범선의 돛대 앞에 있었고 저녁 무렵 해변에서 사자를 보았었지.”
_본문 26-27쪽

“(시슬러 선수의 아버지가) 제 나이 때 빅 리그에서 경기를 했어요”라고 소년은 말하고 있다. ‘시슬러 선수의 아버지’는 누구일까? 그는 미국인들이 야구 천재로 추앙했던 조지 시슬러(1893-1973)로, 22세에 메이저리그에서 뛰기 시작했다. 소년은 그가 “제 나이 때 빅 리그에서 경기를 했어요”라고 말한다. ‘boy' 마놀린은 어린 소년일 수 없다.
그렇다면 작품 속 마놀린의 나이를 22세쯤으로 보면 될까?
역자 이정서는 ‘현실’과 ‘문학적 표현’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17, 18세쯤으로 보는 게 적절하다고 말한다. 시슬러는 17세 때 센트럴리그 소속 구단 애크론과 계약했는데, 이 계약은 그가 미성년자일 때 이뤄졌다는 이유로 나중에 소송을 통해 미국인들 사이에 크게 회자된다. 미국인들의 머릿속에서 조지 시슬러는 그때쯤 ‘빅 리그’에서 뛴 선수로 인식된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우리 번역은 헤밍웨이의 공개적 언급조차 무시 또는 간과했다. 기존 번역 중 하나가 이런 식이다. ‘young boys’가 ‘아이들’이 되고 만다.

“모르겠는데요.” 소년은 대답했다. “제가 아는 건 아이들은 늦게까지 깊이 잔다는 것뿐이에요.”
“I don’t know,” the boy said. “All I know is that young boys sleep late and hard.”
(『노인과 바다』, 이인규 역, 문학동네, 25쪽)

정확한 번역은 이렇다.

“저는 모르죠,” 소년이 말했다. “제가 아는 건 청소년들은 늦게까지 열심히 잔다는 거죠.”
_본문 28쪽

누가 감히 ‘하드보일드’를 말하는가?
의역와 오역이 증발시킨 헤밍웨이의 문체


헤밍웨이의 글은 건조하고 간결하다. 불필요한 수식 없이 신속하고 거친 묘사로 ‘사실’들을 쌓아 올린다. ‘하드보일드(hard-boiled)’ 스타일의 전형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기존 번역서에서 헤밍웨이의 ‘하드보일드’를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헤밍웨이의 문체에 대해 강조하면서도, 정작 헤밍웨이 글의 서술 구조를 제대로 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장을 역자 임의로 쪼개고 더하고, 쉼표와 마침표를 무시했으며, 대명사를 자기 임의로 해석해 왔다. 헤밍웨이가 공들여 선택한 단어들도 문맥에서 이탈해 자의적으로 옮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역자가 지적하는 몇 가지 사례다.

1) beat : 물고기가 노인을 두드려 팬다?
기존 번역서에 등장하는 노인과 소년의 대화는 이런 식이다.

“놈들이 나를 두드려 팼어, 마놀린.” 그가 말했다. “정말 엄청나게 두드려 맞았지.”
“하지만 저 잡아오신 물고기가 할아버지를 두드린 건 아니겠죠.”
“아니지, 두드려 맞은 건 나중 일이지.”

노인이 물고기에게 엄청나게 두드려 맞았다? 기묘한 상황이다. 인용 부분 첫줄의 원문은 이렇다.

“They beat me, Manolin,” he said. “They truly beat me.”

beat는 ‘치다’ ‘때리다’가 아니라 ‘이기다’란 의미로 봐야 뜻이 통한다.

“그들이 나를 이겼단다, 마놀린.” 그는 말했다. “그들이 확실히 나를 이긴 거야.”
_본문 132쪽

2) steady : ‘튼튼한’이 아니라 ‘한결같은’
<노인과 바다>에는 작은 새 한 마리가 배로 날아와 위태롭게 보이는 낚싯줄에 내려앉아 휴식을 취하는 장면이 묘사된다.

“It’s steady,” the old man told him. “It’s too steady. You shouldn’t be that tired after a windless night. What are birds coming to?”

기존 번역을 보자.

“그건 튼튼한 줄이란다.” 노인은 새에게 말했다. “아주 튼튼한 줄이지. 간밤에 바람도 하나 없었는데 그렇게 지쳐서야 되겠니? 그런데 새들은 결국 어떻게 되는 걸까?”

“줄은 든든해. 아주 단단하다고. 간밤에는 바람 한 점 없었는데 그렇게 지쳐서야 되겠니.” 노인이 새에게 말했다. “새들은 앞으로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줄이 튼튼하다”고 말할 문맥이 아니다. 이 문장에서 ‘steady’는 ‘한결같다’ ‘꾸준하다’ ‘변함없다’는 의미로 봐야 한다는 게 이정서 역자의 설명이다. “It’s steady”는 “한결같구나”의 뜻이다. 실제로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에서 steady란 형용사를 여러 번, 그리고 일관된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the steady movement of the water(물의 한결같은 움직임)
the steady hard pull of the line(한결같은 낚싯줄의 강한 당김)
the steady good weather(한결같이 좋은 날씨)
with a steady pressure(한결같은 압력으로)
The fish is calm and steady.(물고기는 침착하고 한결같았다.)

3) far out : ‘거리’가 아니라 ‘정도’
번역자들은 원서 속의 ‘far’를 기계적으로 ‘멀리’(부사) ‘먼’(형용사)으로 옮긴다. 전치사 ‘out’이 붙어 그 의미가 강조된 걸로 해석한다. 과연 그럴까? 떼로 움직이는 물고기들을 묘사한 문장이 있다.

But they are working far out and fast.

기존 번역은 천편일률적이다. “다랑어 떼가 아주 멀리 빠르게 움직이고 있군.” “다랑어 떼는 모두 빠르게 멀리 이동하고 있어.” 등으로 거리를 강조한다.
하지만 far out은 ‘거리’가 아니라 ‘정도’를 나타낸다. 바다 위의 모든 것들이 평소와 다른 속도로 빠르게 이동하는 광경을 보며 노인은 의아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정서 역자의 번역.

하지만 그들은 굉장할 정도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어.
_본문 45쪽

감탄사적 의미로서의 이 far out은 바로 밑에도 다시 한 번 쓰인다.

This far out, he must be huge in this month, he thought.

기존 번역은 여전히 ‘멀리’라는 뜻에 집착한다. “이렇게 먼 바다까지 나온 걸 보면…” “이렇게 먼 바다인데다…”로 옮기고 있다. 원래 서술 구조 그대로 직역하면 이렇게 자연스러운 문장이 되는데도 말이다.

“이 굉장한, 이놈은 이달에 나오는 것 중에서도 아주 큰 것임에 틀림없어, 하고 그는 생각했다.”
_본문 46쪽

4) and/but : 무조건 ‘그리고/하지만’인가?
이정서 역자는 아울러 “헤밍웨이 문체의 특징은 무엇보다 and와 but의 사용에 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기존 역자들은 ‘and=그리고’와 ‘but=하지만’의 등식에 머문다. 문장의 뜻이 통하지 않으면 문장의 다른 부분을 고치거나 빼버린다.

“Stay at my house if you like, bird,” he said. “I am sorry I cannot hoist the sail and take you in with the small breeze that is rising. But I am with a friend.”
여기서 But은 과연 ‘하지만’의 의미일까?

“네가 좋다면 내 집에 머물렴, 새야.” 그는 말했다. “미안하지만 지금 일고 있는 산들바람으로 너를 데리고 가기 위해 돛을 올릴 수는 없구나. (왜냐하면) 나는 친구와 함께 있거든.”
_본문 61쪽

16년간의 숙성이 탄생시킨 헤밍웨이 최고의 작품
윌리엄 포크너 “그는 신, 창조주를 발견했다.”


헤밍웨이의 문체 그대로 새롭게 번역한 <노인과 바다>는 그야말로 20세기 소설의 고전이다. 헤밍웨이 본인도 자신의 작품들 중 <노인과 바다>를 최고로 쳤다. 편집자 월리스 메이어(Wallace Meyer)에게 원고를 보내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 소설이 내가 내 인생에서 쓸 수 있는 최고라는 것과 이것이 훌륭하고 유능한 작품과 함께 나란히 놓일 때 그 작품을 소멸시킬 것임을 안다.”

1952년에 <노인과 바다>가 출간됐을 때, 헤밍웨이는 10년 넘게 의미 있는 문학 작품을 쓰지 못한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성공한 그의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1940년에 나왔다. 1950년 출간된 소설 <강 건너 숲속으로>는 비평가들에게 혹평을 받았다. 모든 사람들이 헤밍웨이는 작가로서 “끝났다”고 말하고 있었다. 헤밍웨이는 바로 그때, <노인과 바다>를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갑자기 나온 작품이 아니다. 헤밍웨이는 1936년 《에스콰이어》에 에세이를 하나 썼는데, 거기엔 ‘카바냐스(Caba?as)에서 돛단배로 혼자 낚시하는 노인’을 묘사한 구절이 나온다. 자신이 낚은 커다란 청새치에게 이틀 동안 동쪽으로 끌려다녔던 사내가 물고기를 죽이고 이후, 물고기의 피에 이끌려온 상어들과 싸우는 장면이다. <노인과 바다>는 16년간, 그의 머릿속에서 숙성된 후에 나온 작품이다.

<노인과 바다>는 《라이프 매거진》을 통해 처음 발표된다. 헤밍웨이의 소설을 특집으로 실은 《라이프 매거진》 1952년 9월호는 이틀 만에 500만 부가 완판된다. 초유의 베스트셀러가 됐고, 헤밍웨이에게 큰돈을 벌어다주었다. 헤밍웨이는 1953년에 퓰리처상을, 1954년엔 노벨상을 받는다.

“그의 최고 작품이다. 시간은 이것이 그와 나를 포함한 동시대인들의 작품 중 단 하나의 걸작이란 걸 증명할 것이다. 이번에 그는 신, 창조주를 발견했다.”

<노인과 바다>에 대한 윌리엄 포크너의 평이다. 헤밍웨이의 문학적 라이벌조차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작품,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이다.

책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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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34] 그는 항상 바다를 사람들이 그녀가 사랑스러울 때 스페인어로 부르는 라 마르(la mar)라고 생각했다. 때때로 그녀를 사랑하는 이들이 그녀를 나쁘게 말할 때도 있지만 그들은 항상 여자처럼 생각하며 말했다.
[P. 81~82] “물고기 또한 친구지.” 그는 소리 내어 말했다. “나는 저 같은 물고기에 대해 지금껏 보고 들은 바가 없어. 하지만 나는 그를 죽여야만 해. 별들을 죽이려 애써야 하는 게 아니니 기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