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보 스릴러 소설의 아버지’로 평가받는 존 버컨의 소설《39계단》은 독일의 영국 공습을 준비하는 비밀단체 ‘블랙스톤’의 음모를 파헤치는 주인공 리처드 해니의 재치와 기지가 돋보이는 장르문학의 고전이다. 평범한 주인공이 우연한 기회에 알 수 없는 살인 사건에 휘말리게 되고, 살인과 얽힌 비밀단체의 추격을 받으며 마침내 누명을 벗고 그들의 음모를 밝혀낸다는 내용이다. 1915년 첫 출간 이래 단 한 번도 절판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영화감독 히치콕의 1935년 작품을 포함해 모두 세 차례 영화화되었고, 2011년 네 번째 영화가 헐리우드에서 제작 중이라는 소문이 들려온다. 영국 웨스트엔드, 미국 브로드웨이를 필두로 한국에서도 연극으로 각색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모은 바 있다.
장르문학 마니아들이 기다려온 범죄소설의 최고봉
버컨의 소설이 초기 스릴러 작품으로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이유는 시대적 배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대영제국의 전성기인 빅토리아 시대가 저물고 바야흐로 세계 질서가 재편되던 시기. 독일 등 신흥 제국들이 결국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유럽의 앞날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코난 도일의 소설 속 살인사건이 하찮게 느껴질 만큼, 당시 영국 국민들은 외부로부터의 심각한 위협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소설 속 사건보다 훨씬 거대한 비극이 실제로 닥쳐온 셈인데, 평범한 범죄소설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이제 범죄소설 독자들의 관심은 외부의 적을 향하게 될 터였다. 때마침 출간된, 무시무시한 독일 첩자들을 상대로 외로운 싸움을 벌이는 평범한 영국 남자의 새로운 모험담이 선풍적인 인기를 모은 건 당연한 결과였다.
장르로서 스릴러를 정립한 기념비적인 작품
《39계단》의 작가 버컨의 업적은 장르로서 스릴러를 정립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데 있다.《39계단》은 고전적 범죄소설의 다소 정적인 장르 규칙을 과감히 탈피하고 주인공의 영웅적 활약상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풀어가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역동적인 소설이다. 범죄라는 소재를 해결할 목표가 아닌, 이야기를 원활히 풀기 위한 장치로서 활용하는, 더욱 자극적이고 더욱 오락적인 새로운 대중소설이 등장한 것이다. 1915년의 영국 독자들은 전쟁을 일으킨 독일의 음모에 맞서 싸운 작품 속 ‘액션 히어로’의 등장을 열렬히 환영했다. 이 낯선 모험담의 엄청난 상업적 성공에 고무된 많은 젊은 작가와 예비 작가들은 버컨의 작품을 대중소설의 모범으로 여기며, 독자의 긴장감을 유도하기 위해 버컨이 사용한 기법과 장치, 배경 등을 적극적으로 차용했다. 결국《39계단》의 여러 요소는 장르의 공식으로 자리 잡았고, 그런 공식을 따르는 작품들을 하나의 범주에 넣고 스릴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책속에서
“게다가 경찰에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천만다행으로 경찰이 내 이야기를 믿어준다고 하더라도, 적들의 손에 놀아나는 건 마찬가지였다. 카롤리데스의 영국 방문을 막는 것 역시 그들이 원하는 바였다. 어쨌든 죽은 스커더의 얼굴을 본 이후, 나는 진심으로 그의 계획을 믿게 됐다. 계획을 세운 장본인은 이제 죽고 없지만, 그가 가직하던 비밀은 고스란히 내 몫이 됐고, 그의 임무도 내가 대신 떠맡는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스커더가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자에 대한 이야기가 퍼뜩 떠올랐다. 스커더는 분명히 ‘매처럼 눈꺼풀 아래 얇은 막’이 있는 남자라고 말했다. 그제야 비로소 내가 적의 소굴에 제 발로 걸어 들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저 늙은 악당의 목을 졸라버리고 그대로 밖으로 달아나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노인은 내 계획을 예상했다는 듯이 빙그레 웃으며 내 등 뒤로 난 문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뒤를 돌아보니 남자 하인 둘이 내게 권총을 겨누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