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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구기호: 951.531-21-7

- 서명: 1780년, 열하로 간 정조의 사신들 : 대청 외교와 『열하일기』에 얽힌 숨겨진 이야기

- 편/저자: 구범진

- 발행처: 21세기북스(2021-03)

서평
 조선-청나라 평화 관계, 정조의 전향적 외교의 결과였다
서평자
 박현모,한국형리더십연구소 소장
발행사항
 547 ( 2021-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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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글 1780년의 열하를 가다

1부 조선의 반청 의식과 사대 외교

2부 정조의 건륭 칠순 진하 특사 파견

3부 진하 특사 박명원의 사행과 ‘봉불지사’ 소동

4부 박지원 『열하일기』의 ‘봉불지사’ 변호론

5부 전환기의 조선·청 관계와 대청 인식

나가는 글 건륭의 제국과 만나며 역사를 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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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0년 건륭제의 칠순과 관련하여 조선에서 파견한 세 차례의 사행은 정조 연간 대청 외교의 경향적 특징을 단적으로 드러낸다고 말할 수 있다. 정조는 분명 청나라를 상대로 자발적인 성의 표시를 반복했다. 만약 정조가 영조처럼 청을 조만간 망할지도 모르는, 또는 망해야 마땅한 오랑캐 국가로 여겼다면 이러한 현상이 나타날 수 있었을까? (p. 278) 오랜만에, 어쩌면 처음으로 정조의 대외정책을 구체적으로 재해석해 낸 책이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관한 책으로 읽은 분도 있겠으나, 이 책의 주인공은 정조(正祖)다. 저자 구범진 교수가 『1780년, 열하로 간 정조의 사신들』이라고 ‘정조’를 책 제목으로 정한 것도 아마 그럴 뜻일 거라 짐작한다. 정조의 대외정책에 대해서 그동안 국사학계에서는 ‘대명의리론’의 관점, 즉 내심은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겉으로 청의 힘을 두려워하여 순종하는 척하는 ‘면종복배(面從腹背)’ 외교로 간주해 왔다. 하지만 정조는 이 책에서 보듯이, 사신을 보내야 할 의무가 없었음에도 건륭제 칠순을 축하하는 특사를 파견했다. 중국황제 생일에 맞추어 특사를 140년 만에 처음으로 조선 국왕이 ‘자발적으로’ 보냈다. 이때 특별히 정조가 신뢰하는 왕의 고모부 박명원이 정사로 임명됐고 그의 8촌 동생 박지원도 자제군관으로 따라가는 행운을 얻었다. 건륭제 역시 “관례를 깬 정조의 자발적 의사표시”에 화답하여 “파격적인 우대 조치”로 화답했다. 박명원 등 조선사신단은 열하의 피서산장에서 황제를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눴으며, 여러 차례 황제의 초대로 연희 공연을 즐겼고(불꽃놀이 포함), 국왕 정조에게 내리는 특별 예물(비단)을 받아왔다. 1780년에 일어난 양국 간의 우호 외교, 즉 조선 국왕이 ‘자발적’으로 사신을 파견하고 그에 화답해 중국 황제가 ‘파격적’ 우대조치를 한 것이 일회성이 아니었다. 3년 뒤인 1783년에도 건륭제의 순행(巡行) 장소였던 선양으로 생일축하 겸 문안 사신을 보냈다. 흥미로운 것은 순행 일정이 늦어지면서 황제의 선양 도착 날짜가 미뤄졌는데, 정조는 그 소식을 듣고도 예외적으로 조선 사신을 선양에 머무르게 하면서 그 이유로 사대의 의리[事大之義]와 우리나라의 이해[我國之利害]를 들었다. ‘대명의리’를 주장하는 조선 국왕이 청나라에 대한 사대 의리를 거론하고, 국가 이익을 말한 것이다. 이런 모습은 조선 전기의 세종을 연상시킨다. 세종은 한편으로 강대국 명나라에 지성(至誠)사대를 하면서 다른 한편 북방영토개척이라는 국가이익을 챙겼다. 그런데 정조는 왜 “선왕 영조 때까지는 상상조차 어려웠을 자발적 성의표시를 반복”한 것일까? 그에 대한 답을 말하기 전에 이 책의 별미라 할 수 있는, 서평자의 눈에 새롭게 다가온 몇 가지 사실을 소개하려고 한다. ▷ 발견1. 조선 후기 청나라 여행경험자는 연인원으로 17만 명 이상으로, 근대 이전 시기에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국경을 가로지르는 장거리 여행에 참여한 일은 세계사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렵다(88쪽). ▷ 발견2. 청나라에 조공사절단을 파견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만 ‘무역의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는 종래 주장은 ‘오해’다. 연구결과 조선에서 동지사 사절단을 보낼 때마다 전(錢)18만 냥(쌀로 약 17만6천여 석)을 매년 손해 보았는데, 이것은 정부의 최대 재정기관인 호조 세입의 1.4배가량에 해당한다. “조선의 청에 대한 조공은 기본적으로 국가의 안전보장과 왕조의 체제 유지를 위한 것”이었다(91-94쪽). ▷ 발견3. 사행(使行)의 하이라이트인 황제와의 만남 및 불꽃놀이 구경, 그리고 (생생히 묘사된) 건륭제와 티벳불교의 전생활불(轉生活佛) 판첸의 대화 장면은 박지원이 직접 보지 않고 기록한 이야기다(242-250쪽). 박지원은 정사·부사·서장관처럼 핵심외교관이 아니라 종인(從人: 수행단)으로 따라갔기에 황제가 있는 궁궐(피서산장)에 들어갈 수 없었고, 숙소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는 늦게 일어나 궁궐에서 들려오는 불꽃놀이를 구경하거나 이런저런 물건들을 구경했을 뿐이다(245-246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해들은 이야기를 시간 순서를 바꾸고, 황제의 대화를 재배치하여 궁궐 안에 들어갔던 사람들보다 훨씬 더 상세히 그려냈다. 그러면 정조는 왜, 그리고 어떻게 그 이전 국왕들이 하지 않던 적극적인 사대외교를 펼쳤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780년 전후로 일어난 조선 내부 몇 가지 사건들을 살필 필요가 있다. 박지원 일행이 열하로 가기 두 해 전인 1778년 7월 박제가가 『북학의』를 펴냈다. 1779년 3월 규장각에 검서관을 두었다(박제가 등 4검서 등용). 1780년 2월 정조의 측근 홍국영이 숙청되어 고향으로 쫓겨갔다. 열하사행 후 2년 뒤인 1782년 9월 정조의 첫 번째 아들(문효세자)이 태어났다. 여기서 보듯이 1780년을 전후한 4-5년은 무언가 새로운 변화를 시도해 보려는 움직임이 싹트는 시기였다. 서평자가 2018년에 출간한 『정조평전』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 시기는 “정조의 생애 중 가장 느긋한 때”였고, 권신 홍국영 대신 규장각 인재들과 더불어 새로운 정치를 도모하는 시기였다. 즉위 초반부터 계속되던 역모사건이나 정적 숙청이 마무리된 시점에서 국왕의 뜻을 따르는 인재들과 함께 정치혁신을 준비하되, 대외적으로도 청나라와의 외교를 전향적으로 바꿔가려는 즈음에 열하로 사신단이 출발한 것이다. 이 책은 바로 18세기 후반에 돌연히 조성된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평화와 우호가 국왕 정조와 건륭제의 정치적 필요와 노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