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표지이미지

- 청구기호: 909-21-4

- 서명: 문명은 왜 사라지는가 : 인류가 잃어버린 25개의 오솔길

- 편/저자: 하랄트 하르만

- 발행처: 돌베개(2021-01)

서평
 세계사의 인적 드문 오솔길들로의 산책
서평자
 김경현,고려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발행사항
 539 ( 2021-08-04 )

목차보기더보기

1. 쇠닝겐 창의 비밀
2. 곰, 야생 백조, 여성 수호신들
3. 거대한 빙하 위의 물범 사냥꾼
4. 인류 최초의 신전 건축물
5. 위대한 여신과 모기
6. 고유럽의 영향력
7. 신화적인 딜문
8. 하라파와 모헨조다로 사이
9. 하투샤 성벽 앞 신들의 행렬
10. 누란의 금발 미녀 미라
11. 전설적인 황금의 땅 푼트
12. 펠라스고이인의 수수께끼
13. 투우와 나선형 문자
14. 닻에서 물탱크에 이르기까지
15. 스키타이 기마 유목민
16. 신비에 싸인 아마조네스
17. 페루의 구름의 전사들
18. 테오티우아칸의 피라미드
19. 조인(鳥人) 숭배와 바닷가의 거석 증거물
20. 악숨과 사바의 여왕
21. 요정의 굴뚝과 지하 도시들
22. 사막의 여왕 제노비아
23. 앙코르와트의 버려진 신전 탑들
24. 대(大)짐바브웨의 거대한 석벽
25. 아마존 열대우림의 기하학 형태 유적

서평보기더보기

여기서 선택한 문명과 제국은 최신 연구 상황을 토대로 기술했다…여기서는 언어학과 문화학 이외에도 고고학과 종교사 또는 인간유전학 같은 분야도 참작할 것이다. 각 주제와 연구 현황에 따라서 서로 다른 관점이 고려되겠지만 최대한 포괄적인 그림을 그리는 데 주안점을 둘 것이다. 마지막에는 하나의 문명이 잊힌 까닭은 무엇이고 혹시라도 계속 남아 있는 요소는 무엇인지, 더 파헤쳐야 할 수수께끼는 무엇인지 물을 것이다. (p. 13) 번역서이니만큼 먼저 번역의 문제부터 말해 보자. 전체적으로 아주 잘 읽히는 솜씨 좋은 번역이지만, 두 가지 가볍지 않은 흠이 있다. 하나는 원작의 ‘문화’를 모두 ‘문명’으로 옮긴 점이다. 저자는 두 개념을 분명히 구별하고 있다. 가령 1~2장에서처럼 구석기 시대를 다룰 때는 매우 적절하게 ‘문화(Kultur)’란 단어를 사용한다. ‘문명(Zivilisation)’이란 대체로 청동기 시대부터 시작되는 역사현상인 까닭이다. 그런데 번역서는 1~2장에서 간간이 “가장 오랜 문명은 구석기 시대에서 유래한다.”(10쪽, 28쪽)라고 옮겼다. 거기서 ‘문명’은 마땅히 ‘문화’로 옮겨야 한다. 게다가 이 책은 주로 문명들보다 문화들을 다루고 있으므로, 번역서의 합당한 제목은 『세계사의 잊혀진 문화들』이다. 두 번째 흠결은 바로 그런 개념 혼동에서 비롯한다. ‘문명은 왜 사라지는가’라는 역서의 제목은 저자의 취지와 크게 동떨어진 것이다. 저자는 교양대중이 잘 모르는 세계의 문화들, 그러니까 ‘오솔길’처럼 사람의 인적이 드문(그러니까 ‘잊혀진’) 문화들을 소개하려 할 뿐, ‘문명의 몰락 원인’처럼 무겁고 진지한 주제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기에 25개 문명들의 몰락 원인을 종합하는 결론의 장이 마련되지 않은 것이다. 저자 하르만은 현재 미국 소재「고고신화연구소」에 속한 독일 작가로, 1990년부터 최근까지 무려 40여 종의 책을 펴낼 만큼 아주 왕성한 필력을 자랑한다. 초기에는 주로 문자와 기호의 역사를 다루었으나, 최근 10여 년 동안은 인류학, 고고학, 세계사의 초기로 관심사가 크게 바뀌었다. 저자의 전문 영역이 언어학에서 세계사로 크게 이동하거나 확장되고 있다. 사실 유럽 초기 언어들을 연구하다가 그 역사적 배경인 유럽과 인접 지역의 초기 문명으로 시야를 넓힌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의 경력을 살펴보면, 그의 저술주제가 그처럼 달라진 또 다른 이유가 짐작된다. 그는 일찍이 독일에서 언어학 분야의 교수자격을 취득했지만, 강의경력은 그 직후 약 10년간(1970~1982년) 독일과 일본에서 시간제 강사로 일한 게 전부였다. 말하자면 그는 대학의 정교수 혹은 상근연구원으로 정착하지 못한 것인데, 이는 장기적으로 그의 연구 및 저술활동의 방향전환에 결정적 요인이었을 것이다. 학생지도나 논문 집필을 위해 전공연구를 심화하는 것에 큰 의미가 없었으므로, 대신 그는 인문분야의 교양서적을 집필하는 전업 작가라는 대안의 길을 택했다. 그에 따라 언어학, 언어사라는 좁은 범위를 벗어나 더 넓고 대중적인 영역, 즉 세계의 초기 문명과 문화들로 시야를 넓힌 듯하다. 특히 최근에 빠른 템포로 내놓은 일련의 저술들에서 그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로마의 기원』(2019), 『고대 그리스 문명의 뿌리』(2014), 『민주정이라는 신화』(2013), 『다뉴브 문명의 수수께끼』 (2011), 『수의 세계사』(2008) 등이다. 이 중에서 마지막 책은 이미 수년 전에 국내에 『숫자의 문화사』(알마, 2013년)로 번역된 바 있다. 이 번역서도 그렇지만 하르만의 책들은 대부분 전문서와 대중서 그 사이로 분류된다. 해외에서 이 책에 대한 서평이 전무한 것은 당연한 일로, 창의성, 전문성을 추구하는 연구서로 취급되지 않는다는 자명한 증거이다. 하지만 책 말미에 수록된 방대한 참고문헌은 매우 인상적이며, 이 책이 결코 아주 평이한 대중서가 아님을 시사한다. 사실 하르만의 저술활동은 바로 의식적으로 그 중간지대 독자층을 겨냥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 책에서 그는 25개 문화 각각에 관한 수십 종의 전문서들을 소화해, 최근의 연구동향과 아울러 전문가들 사이에서의 논의지형과 그 특징을 요령 있고 간명하게 소개하고 있다. 방대한 주제 범위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균질적이고 가독성이 높은 서술의 수준을 유지한 것은 역시 수십 권의 책을 펴내면서 쌓인 필력 외에, 한때 전문가로서 수련을 거친 그의 지적 역량 덕분이라 판단된다. 이 책이 다루는 25개의 세계 문화들은 지리적으로 구세계(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와 신세계(중남미)에 걸쳐 고르게 분포하며 대체로 연대순으로 배치되어 있다. 빙하기의 초기 인류와 구석기, 중석기 문화(1~4장)에 이어 신석기와 청동기 문화(5~16장)를 거쳐, 서기 15~16세기에 유럽인이 도래하기 전에 발달했던 신세계와 아시아, 아프리카의 문화들(17~25장)에 이르고 있다. 이 책은 진정 저자가 친절하게 부제로 삼은 ‘세계사의 인적 드문 오솔길들’로 우리를 안내하는 훌륭한 길잡이라 할 만하다. 서술 수준이 대체로 균질적이지만, 작가의 강점은 역시 그의 지적 고향이라 할 영역, 즉 인도유럽어족과 그들의 역사를 다룰 때 확연해진다. 유럽과 아시아의 구세계 문화들을 다룬 부분(1~15장)이 그러하며, 특히 인도 초기 문명의 언어(8장), 그리스와 이탈리아의 문자와 언어를 다룬 곳(12~14장)을 주목해보라. 독자는 거기서 언어학자로서 하르만의 깊은 지식이 거시적 전망과 잘 어우러져 있음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