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묘조왕세자책례계병(正廟朝王世子冊禮稧屛)》은 1800년(정조 24년)에 치러진 왕세자(王世子)의 책례(冊禮)를 기념해 선전관청(宣傳官廳)에서 발의한 계병(稧 屛)이다. 그런데 《정묘조왕세자책례계병》은 정조(正祖, 재위 1776-1800) 시대의 계병들 중에서도 매우 이례적인 작품이다. 계병의 화제(畫題)가 행사도가 아닌 요지연도(瑤池宴圖)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로 좌목(座目)을 검토한 결과 《정묘조왕세자책례계병》은 1802년(순조 2년) 이후 순조(純祖, 재위 1800-1834) 시대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계병의 서문(序文)과 요지연도라는 그림이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에 근거할 때 계병의 화제는 나중에 선택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즉 《정묘조왕세자책례계병》은 정조 시대에 책례를 기념해 발의되어 서문까지 작성되었으나 실제 완성은 1802년 이후에 이루어진 작품으로 파악된다.
흥미로운 점은 《정묘조왕세자책례계병》이 완성되었을 무렵인 1802년 10월에 순조와 순원왕후(純元王后, 1789-1857)의 가례(嘉禮)가 거행되었다는 것이다. 이 가례는 본래 1800년에 책례와 함께 거행될 예정인 행사였다. 그러나 정조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인해 가례 준비는 중단되었으며 정조의 삼년상이 끝난 뒤에 비로소 가례가 거행될 수 있었다. 원래 책례와 함께 기획된 행사였다는 점에서 가례는 계병이 완성된 계기였을 확률이 높다. 또한 요지연도는 당시 왕실과 사가(私家)에서 혼례와 밀접하게 연관된 그림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특히 서왕모(西 王母)는 잔치의 주인이라는 점에서 혼례의 주인공인 여성을 비유할 수 있는 상징이었다. 이러한 상징적 의미 때문에 요지연도 병풍은 1802년의 가례 당시 순원왕후를 위해 그녀의 처소에 설치되기도 했다. 이 무렵에 완성된 《정묘조왕세자책례계병》의 요지연도에도 왕실 가례를 연상시키는 도상들이 그려져 있다. 즉 《정묘조왕세자책례계병》은 순원왕후의 가례가 성사된 이후 이를 기념해 완성된 작품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당시 순조와 순원왕후의 가례는 성사 여부를 두고 매우 첨예한 정치적 갈등이 일어난 사건이었다. 순조 시대 초기에 집권한 벽파(僻派) 세력은 시파(時派)인 김조순(金祖淳, 1765-1832) 가문의 국혼(國婚)을 의도적으로 막으려 했다. 그러나 김조순 가문의 국혼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정조의 뜻에 따라 결국 가례는 성사되었다. 가례가 마침내 성사되자 한동안 위축되었던 시파는 벽파를 왕실에 위협을 가한 역적(逆賊)으로 몰아 제거하였다. 왕실의 고위 무관(武官)이었던 선전관(宣傳官)들은 당시 시파와 정치적으로 매우 가까웠기 때문에 벽파의 탄압을 받았다가 가례가 성사된 이후 세력을 회복하였다. 선전관들은 시파 중에서도 국구(國舅)로서 군사권을 갖고 있던 김조순과 긴밀한 정치적 유대를 맺고 있었다. 이처럼 가례를 두고 정치적 대립이 일어난 직후에 선전관들은 왕실 가례를 연상시키는 그림인 요지연도를 계병의 화제로 선택하였다. 1802년의 가례에 부여되었던 정치적 의미 및 요지연도와 가례의 연관성을 고려할 때 《정묘조왕세자책례계병》은 선전관들이 가례를 통해 자신들의 세력이 회복된 것을 기념하고자 완성한 계병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