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 1392-1573)와 조선 초기에 제작된 그림들 중에는 국적(國籍) 문제가 남아있는 작품들이 여러 점 있다. 조선 초기의 회화와 일본 무로마치시대의 수묵화 사이의 교섭 양상을 알려주는 중요한 작품으로 그동안 주목을받아 온 〈파초야우도(芭蕉夜雨圖)〉(1410년경, 토쿄국립박물관((東京国立博物館) 소장) 역시 작자(作者)의 국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작품이다. 이 그림에는 1410 년 아시카가 요시모치(足利義持, 1386-1428)의 쇼군(將軍) 취임을 축하해주기 위해 일본에 봉례사(奉禮使)로 파견된 집현전 학사 양수(梁需, 15세기 초에 활동) 의 제찬(題贊)이 적혀있다. 그는 1410년 8월에 쿄토(京都)의 난젠지(南禪寺)에서 열린 고잔(五山) 선승들의 시회(詩會)에 초청을 받아 참석한 후 칠언절구의 제시(題詩)를 〈파초야우도〉에 남겼다. 양수가 어떤 계기로 이 시회에 초청을 받았는지는 현재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런데 양수의 제찬으로 인해 〈파초야우도〉의 국적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카나자와 히로시(金澤弘) 등 일부 일본 학자들은 〈파초야우도〉에는 조선(朝鮮) 화풍(畵風)이 나타나 있으며 아마도 이 그림은 양수가 대동(帶同)한 조선 화가가 그린 작품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파초야우도〉는 난젠지의 젊은 승려인 잇카 켄푸(一華建怤, 1410년-1460년에 주로 활동) 가 「초창추우(蕉窓秋雨)」 또는 「추우파초(秋雨芭蕉)」라는 시를 짓고 시의(詩意)를 표현하기 위하여 제작한 그림이다. 한편 이 그림에는 취묵(吹墨, 吹き墨, 후키즈미) 기법이 적극적으로 사용되어 있어 주목된다. 취묵 기법은 붓에 먹을 잔뜩 묻힌 후 화가가 입으로 붓끝을 불어서 작은 묵점(墨點)이 화면에 분사(噴射)되도록하는 기법이다. 〈파초야우도〉의 전경(前景)과 중경(中景)에는 무수한 작은 점들이 뿌려져 있다. 조선시대 전체 회화 작품들 중 취묵 기법이 사용된 예는 현재까지 알려져 있지 않다. 취묵 기법이 사용된 가장 연대가 올라가는 작품은 남송시대(南宋時代, 1127-1279)의 화가인 진용(陳容, 13세기 전반에 활동)이 그린 〈구룡도권(九龍圖卷)〉(1244년, 미국 보스톤미술관(The Museum of Fine Arts, Boston) 소장)이다. 일본의 선승화가(禪僧畵家)인 구케이(愚谿, 1361-1375년에 주로 활동)가 그린 〈우중산수도(雨中山水圖)〉(토쿄국립박물관 소장)에도 취묵 기법이 적극적으로 사용되어 있다. 〈우중산수도〉는 〈파초야우도〉보다 연대가 앞선 일본의수묵화이다. 한편 킨케이 료빈(金谿良敏, 15세기 후반에 활동)이 그린 〈연지수금도(蓮池水禽圖)〉(클라우스 나우만 컬렉션(The Klaus F. Naumann Collection) 소장)에도 취묵 기법이 사용되어 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회화작품들에서는 볼 수 없는 취묵 기법이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파초야우도〉의 작자는 일본 화가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비록 〈파초야우도〉가 일본인 화가가 제작한 산수화라고 해도 이 그림이 한국회화사 연구에 있어 여전히 중요한 작품임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