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불교미술 중에는 범자(梵字)가 쓰인 것이 적지 않다. 범자는 직접적인불·보살의 가피를 구하기 위해 쓴 것으로 범자 서사는 고려시대부터 계속됐지만 조선 후기에는 좀 더 구체적이고 다양하게 변화되었다. 건축, 회화, 조각, 범종 등미술 장르에 관계없이 다양한 불교 미술품에 범자가 쓰였다. 범자가 쓰인 위치는 불교미술마다 다르고, 일정한 규칙도 없어서 특정한 밀교 종파에서 범자 서사를 주도했다고 보기 어려우며 어떤 일관된 제작 규범이 있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불교 미술품에 쓰인 범자들은 한, 두 글자만 쓴 경우도 있고, 구문을 쓴 경우도 있다. 외자인 경우는 ‘옴’자가 대부분이고, 그 외에 널리 쓰인 것은 ‘옴마니반메훔’의 육자진언이다. 범자와 다라니는 의식에 쓰인 모든 종류의 다라니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들이 선택되었다. 육자진언 외에 가장 널리, 그리고 가장 잘 알려진 진언인 정법계진언, 삼종실지, 준제진언이 주로 쓰였다. 불교 미술품에 범자를 쓴 것은 조선 후기에 처음 생긴 일은 아니지만 이 시기에 법당 건축, 불교 의식구, 범종과 불화로 확대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는 의례를 위한 의식 공간이라는 공적인 영역으로의 확산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불교가 지역 신앙공동체의 상생을 위한 중심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조선 후기 범자 다라니의 활용을 촉진한 것은 각종 의식집의 발행과 언문이다. 신도들은 의례를 통해 구체적인 음성과 문자, 범패 등으로 자신들의 종교적, 세속적 기원을 이루고자 신과 소통하려 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에 이어진 기근과 전염병의 만연으로 공동체의 기반이 무너질 만큼 혼란이 이어진 시기에 각 지역의 불교계는 백성들을 위무하고 공동체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해 각종 의례를 행하였다. 다양한 의례를 할 때, 의식의 정확성과 엄밀성을 높이기 위해 의식집과 진언집이 간행되었다. 진언집에 쓰인 불번어 범자 다라니에는 한글 독음이 더해졌으며 의식집의 간행을 통해 의례가 표준화되었다. 언문으로 폄하되었던 한글은 조선 후기에 들어 실담자를 위해 읽기 쉬운 독음 표기로 쓰였으며 그 결과 언문을 알면 실담 진언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진언집 간행은 일차적으로 다라니의 발음과 운율의 정확성을 기하고, 더 많은 승려와 도반이 올바른 발음으로 범어 다라니 송주를 하도록 만드는 데 목표를 두었다. 언문 독음을 단 다라니를 읽을 수 있는 신도들이 불교의식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언문의 대중적 보급과 목판인쇄의 발달에 따라 가능해진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