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에 발견된 전 황복사 석탑 사리함기의 ‘ ’자는 그동안 ‘조(厝)’와 ‘묘(廟)’의 두 가지로 판독되었다. 그러나 최근 첨단 광학기기를 활용하여 새롭게 명문을 촬영한 결과 ‘ ’자는 ‘조(厝)’의 이체자(異體字)로 확인되었다. 또한 ‘묘(廟)’로 판독되었을 때보다 ‘조(厝)’로 판독된 것이 문맥상으로도 보다 매끄럽게 해석되었다. ‘조(厝)’는 본매장(本埋葬) 이전에 얕게 가매장(假埋葬)한 것을 뜻하기 때문에, 전 황복사 경내에 신문왕의 가매장이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 결과 전 황복사 안에 신라 종묘가 설치되었던 것이라는 기존의 해석은 근거를 상실하게 되었다.
삼국시대의 가매장은 왕족, 귀족, 승려를 막론하고 지배계층에서 행해졌던 일반적인 장법(葬法)이었다. 다만,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3년 동안 행해졌음에 반해 신라에서는 1년 동안 행해져 다소 차이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문왕의 조장(厝葬)이 전 황복사 안에서 행해졌고, 탑에서 나온 사리함기에 이것이 기록되어 있었다면, 현재 석탑이 세워진 자리는 신문왕의 본장(本葬)이 행해지기까지 1 년간 모셔졌던 가매장터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사찰 내에서 빈장(殯葬)을 행하고 그 자리에 탑을 세운 전 황복사지의 사례는 전통적인 장법인 조장(厝葬) 관습과 함께 『조탑공덕경』과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등과 같이 탑과 관련된 불교 신앙과 관련을 갖고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당의 지바가라와 신라승 원측 등에 의해 680년에 한역(漢譯)된 『조탑공덕경』은 693 년에서 700년 사이에 이루어진 전 황복사지 석탑의 최초 건립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으며 당의 미타산에 의해 704-705년경에 한역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전 황복사지 석탑의 사리함기에 언급되어 있듯이 706년에 행해진 석탑의 보수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매장을 비롯한 전통적인 장법과 함께 불교적인 장법인 탑파(塔婆)의 결합 양상은 唐의 신회대사 묘탑, 발해 정효공주의 묘탑, 신라의 도선국사 묘탑 등 관과 탑의 결합으로 나타났는데, 전 황복사지 석탑의 사례처럼 빈장터와 탑의 결합 양상은 매우 독특한 사례이다.
전 황복사지 석탑 사리함기의 ‘조(厝)’ 기록을 통해 신라 사회의 사찰 내 조장(厝葬)의 가능성이 제기되었으며 조탑(造塔)과 수탑(修塔) 신앙의 유입과 성행 등도 확인되었다. 즉, 전 황복사지 석탑은 신라의 전통적인 장송 문화의 빈장 문화와 불교 문화가 결합된 모습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