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항공독립운동’의 대표적 인물인 崔用德을 통해 중국 공군에서의 한국인 활동을 상세히 규명했다. 최용덕은 독립운동에 투신한 뒤, 1923년 베이양(北洋)정부의 바오딩(保定)항공학교에 들어갔다. 그의 입교는 중국 내에서도 이른 편이었다. 그는 군벌 사이의 치열한 대립 속에서 졸업 전부터 내전에 투입되었으며, 비행사가 된 후에도 시안(西安)포위전에서 폭격, 정찰, 선전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실전 경험을 갖춘 비행사로 중시되어 1926년 북벌에 나선 국민혁명군에 포섭되었다. 그는 실력과 품성을 기반으로 동료들에게 신망을 얻고 있었으며, 경력도 오래된 편이었기 때문에 국민혁명군 합류 후에도 상대적으로 높은 직위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는 장제스(蔣介石)의 권력 강화와 직결된 탕성즈(唐生智)와 장파쿠이(張發奎) 토벌, 中原大戰 등의 주요 전투에서 공적을 쌓았다. 그는 1932년 제1차 상하이(上海)사변의 공중전에 가담하진 못했지만, 이를 계기로 본격 추진된 중국의 항공력 강화 정책에서 다시금 두각을 드러냈다. 그는 미국 고문단의 시험에 의해 기성 비행사의 대부분이 도태되는 상황에서도 역량을 인정받고서 중앙항공학교의 교관으로 활약했다. 그는 불의의 사고로 비행을 접은 후에도 중국 공군의 陸空連絡 도입을 주도했다. 중일전쟁 발발 직전 그는 중국 공군에서 가장 중요한 난창(南昌)기지의 사령관(總站長)을 맡는 등 핵심 인사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외국 출신이라는 약점을 본인의 노력으로 극복했으며, 이렇게 획득한 중국 공군에서의 지위와 신임을 독립운동의 활동에 이용했다. 이러한 점에서 최용덕이 중국 공군에서 적극적으로 복무했던 것은 중국 공군 복무는 독립운동이 원활하게 전개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려는 노력에서 기인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