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정화암의 독립운동과 그 과정에서 이루어진 아나키즘 수용에 관한 연구이다. 정화암은 재중한인 아나키즘 독립운동사에서 있어 당대에도 상당한 위상을 차지했고 현재의 한국 아나키즘 독립운동사가 편찬되기까지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이러한 정화암에 대한 연구는 한국 독립운동사의 이해를 위해 선행되어야 할 작업이다.
정화암은 3·1운동을 경험하며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뒤 중국에서 아나키즘을 수용했다. 그 후 1924년 북경에서 이회영, 이을규, 이정규, 백정기, 류자명과 함께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며 최초의 재중한인 아나키즘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했다. 1931년 9월에 이르러 정화암은 상해에서 남화한인청년연맹을 결성해 한인애국단과 더불어 1930년대의 의열투쟁에서 한 축을 담당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정화암은 임시정부 및 중국 인사들과 함께 일본에 맞서 싸웠다.
이를 통해 살펴본 정화암의 활동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정화암은 일제와 중국이 주시한 한인 아나키즘 독립운동의 지도자였다. 그는 지속적인 아나키즘 독립운동을 전개해 왔다. 1930년대 이후 정화암은 아나키스트들의 의열투쟁을 기획·지도해 일제와 맞섰고 중일전쟁이 일어난 뒤에도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일제는 의열투쟁의 중심에 있는 정화암을 위험인물로 간주하며 그를 주시했다.
둘째, 정화암은 3·1운동부터 8·15광복에 이르기까지 독립운동의 산증인으로 활동했다. 정화암은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의 한계를 모두 극복할 독립운동의 방략으로 아나키즘을 채택했지만, 각계 독립운동가와 깊이 교류했고 중국에서 전개된 대부분의 아나키즘 독립운동에 관여했다. 이러한 그의 경험은 독립운동 증언자로서 아나키스트 독립운동사의 복원에 기여했다. 지역적으로는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화남지역에서 전개된 독립운동을 조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셋째, 정화암의 활동에 있어 중국 혁신 인사 및 임시정부, 흥사단 등 여러 항일인사와의 교류가 두드러지는 점에 주목해 보는 것이다. 그가 맺어온 국내외의 폭넓은 인적 관계를 통해 재중국 아나키즘 독립운동의 양상을 다시금 환기해 볼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