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 암살 미수 사건으로 알려진 이재명의 이완용 처단 의거(1909)는 당시 안중근 의거보다 뛰어나다는 논평이 나올 정도로 높이 평가되었지만, 관련 연구는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본고에서는 이재명 의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김중화를 집중적으로 조명하였다. 대한의원 부속 의학교 학생인 그는 정보 수집의 임무를 맡아 거사 당일 이완용의 이동 정보를 이재명에게 전달한 혐의로 7년 형을 선고받고 1914년 가석방되었다. 이후 만주와 연해주를 방랑하다가 흑룡강성 통하현에 정착하여 송강의원 개설, 농지 개간 및 농무계 조직, 양진학교 설립 등 의료, 농업, 교육 사업을 중심으로 민족 자립과 독립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30년 전후 조선인 추방령, 최용건을 위시한 중국공산당의 공격, 만주사변 등을 계기로 통하현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하얼빈으로 이주한 그는 제동의원을 개설하여 의사로 활동하였지만, 그 밖의 활동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해방 후 서울에 정착하여 군사, 종교계, 원호 사업 등을 통하여 적극적인 사회 참여 활동을 전개하였고, 1960년 전후 이래 사회 주요 인사로 부상하였다. 통감부 시대부터 해방 후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조국의 독립과 민주주의 쟁취를 꾀한 그의 삶은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을 그대로 체현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