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건국 초 왕릉제향을 素膳으로 마련하였다. 이는 비슷한 성격의 종묘제향과 차별성을 두어 왕릉제향을 존속시키기 위한 방편이었으나 한편으로는 고려와는 달리 제사의 격이 낮아지며 俗祭로 편입하게 되었다. 그러다 조선후기 주자학의 이해가 높아지며 왕릉제사에 진설되는 찬품에 대한 논의가 일어났다.
유교식 제사에서는 고기를 쓰며 가장 원초적인 형태가 진설될수록 격이 높은 것으로 생각한다. 왕릉제향에 진설되는 찬품에 대한 문제제기는 이러한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현종 때 시작한 논의는 숙종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논의 끝에 국초 이래로 소선을 진설했던 전통과 재원의 증가 등 현실적인 문제가 고려되며 소선이 유지되었다.
조선에서는 국가제향이 이루어지는 곳에 필요한 향을 중앙에서 전달하였으며, 중요한 제향처인 경우 국왕이 직접 향을 전달하였다. 왕릉의 경우 조선 건국 초에는 국왕이 직접 향을 전달하는 곳이었으나 『國朝五禮儀』 체제가 완성된 이후 승지가 攝行하게 되었다. 그러다 숙종 때 傳香祝과 관련된 의절의 정비가 이루어지면서 변화가 있게 되었고, 영조대 이르면 왕릉 역시 국왕에게 향을 직접 전달받는 곳이 되었다. 이는 국왕이 직접 왕릉에 행행하여 친제를 하지 못하는 경우 친전향의를 활용하여 자신의 효성을 드러내는 방편으로 삼은 것이다.
조선은 주자학적 가치를 실현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하지만 일방적인 수용만 한 것이 아니다. 필요한 경우 전통을 수용하는 한편 현실에 맞는 변용을 이루며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