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대 국가적 사업으로 실시된 수군 召募陣의 설치는, 1600년대 말 감축된 수군 전력을 복구하기 위해 실시되었다. 전쟁의 여파로 새로운 수군 병력을 편성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수군 소모진은 전후 남부 연해 지역에 대규모로 발생한 閑田을 屯田으로 활용하여, 군역제 밖에 있던 流民을 수군 병력으로 동원할 수 있었다.
김해부는 지리적으로 소모진 설치에 유리한 지역이 많았으며, 임진왜란 직후 낙동강 방어의 중요성이 대두되었기에, 짧은 기간 동안 신문·청천 2곳의 소모진이 설치되었다.
김해지역의 소모진 설치는 초반부터 유민의 부족으로 인해 난항을 겪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기존 육군 소속 소모진 병력을 수군 소모진으로 이전하는 방식이 이용되기도 했다. 다만 이러한 방식들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김해지역의 소모진은 1620년대가 되어서야 병력과 전선을 완비할 수 있었다.
김해지역 수군 소모진은 설치 초부터 지역민과의 갈등을 빚었으며, 이는 소모진 운영 전반에 악영향을 미쳤다. 수군 소모진과 지역민의 갈등을 유발하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바로 소모군에게 주어지는 復戶였다. 소모군에게 주어지는 복호는 지역민의 조세 부담을 가중시켰다. 지역민의 저항 끝에 인조대에는 소모군에게 주어지는 복호혜택이 감축되었으며, 이는 소모군의 경제적 처지를 악화시켰다.
17세기 중반 수군 소모진은 소모군의 유망으로 운영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소모군의 유망이 심각해진 까닭은 전후 복구가 완료되어가는 과정에서 기존 소모진 둔전으로 수용되었던 농지가 본래 주인에게 반환되거나, 모종의 이유로 감소했기 때문이다. 17세기 중반 이후 조선 정부는 수군 소모진 운영을 정상화하기 위해 새롭게 소모군을 편성하였지만, 이들은 전투병력이 아닌 收布軍의 역할을 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