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고는 조선 초기 종묘 제례에서 가창했던 악장(樂章)의 변화 양상을 탐색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종묘악장은 조선 왕실의 조상들을 송축한 문학이자 음악이다. 제사를 지낼 때 악장을 노래해야만 조상신이 강림하여 복을 준다고 여겼기에, 악장은 신과 인간을 연결해 주는 매개체라는 상징성에서 중요했다. 그리고 왕실 사당이라는 종묘의 위상과 맞물려 조선 건국 후 종묘악장은 제례 악장 중 가장 먼저 개정되었다. 처음에는 악장 본연의 의미를 살려서 각 실에 모신 인물의 공덕을 노랫말로 제작하는 방식으로 운영하였다. 실마다 별도로 악장을 지어 가창했던 것이다. 즉, 1실 1악장 체제를 갖춤으로써 악장의 독립성을 유지하였다. 반주 악현의 형태도 옛 제도[古制]의 충실한 재현을 지향하였다.
그러나 세조가 종묘제례악을 보태평·정대업으로 정하면서 악장의 개별성이 사라졌다. 7인을 송축한 보태평·정대업을 종묘 제사에서 통용했기 때문이다. 또한 가창자를 등가뿐 아니라 헌가까지 삽입하고, 아, 당, 향악기로 확대 구성하였다. 그리하여 현가(絃歌) 중심으로 고즈넉한 분위기에서 가창했던 이전과 달리 공연의 성격이 강화되었다. 이는 종묘제례악의 역사에 변곡점이라고 규정할 만큼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악인(樂人)들은 갑작스러운 변화에 부적응하여, 정전에서 향악을 연주하고 영녕전에서 아악을 주악하는 분열적인 상황을 배태하기도 하였다. 혼란은 지속되었고 이를 정비하기 위한 노력은 성종 말엽까지 이어졌다. 상론한 양상은 『세종실록악보』, 『세종실록』 「오례」, 『세조실록악보』, 『국조오례의』, 『국조오례서례』, 『악학궤범』 등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이렇듯 조선 초기 종묘악장은 ‘형성 – 변혁 – 혼란 – 정비’의 굴곡을 이루었지만, 결국 세조대의 것을 계승하는 방향으로 정리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혼선을 빚었던 연주현장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성종 말엽까지 힘썼음을 확인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장 본연의 의미가 구현된 1실 1악장 제도가 퇴색했기 때문에 논란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