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성리학 수입기에서 정착기로의 이행 과정 저변에서 이루어졌던 미약한 지성사적 흐름을 교육학 논고를 통해 가시화하려고 시도했다. 주된 사료군은 초학서인 가훈(家訓)이었고, 그 가운데 중국 남북조 시기의 관료인 안지추(顏之推)의 『안씨가훈(顔氏家訓)』을 중심으로 조선에 전래되고 변화하는 양상을 살펴보았다. 서지의 인용 양상은 의고적 방식을 세분(參-依-選)하였는데, 가장 미약한 정도의 모방인 참고[參]부터 그 인용의 심도에 따라 의거[依]와 선집[選]이 그것이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저자인 안지추의 생애 및 사상과 『안씨가훈』의 구성, 교육학 및 어문학적 고찰이 종합적으로 이루어졌음을 파악했다. 또한 『안씨가훈』과 선정된 조선의 가훈들을 상호 간에 비교하는 연구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안씨가훈』이 조선에 수입된 실증적 양상에 대한 고찰은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먼저 차후의 논지에 앞서 골격이 되는 『안씨가훈』의 형태 및 내용을 분별하였다. 그 결과, 형태는 ‘다주제 다설명(가훈서)’이었고, 내용은 2가지의 대분류와 5가지의 소분류라는 가설을 제시했다. 전자에는 가문의 유지·현달이 있으며, 후자에는 가문의 특징·개인의 시각·개인의 여가가 포함된다. 다음으로 다수의 문집 및 일기 자료를 통해 『안씨가훈』이 16세기 무렵 조선에 수입되었고 확산되었다는 점을 언급했다. 수많은 문중에 비해 가훈이 남겨진 사례는 적었기 때문에, 소수의 가문 중 직계가 동시에 가문을 남기는 사례를 주목했다. 바로 박융(朴融)의 「거가계(居家誡)」와 그의 증손자 박하담(朴河淡)의 「가훈십조(家訓十條)」이다. 「거가계」에서 「가훈십조」로의 변화 과정은 『안씨가훈』의 수입으로 인한 변화상을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는 비교군이지만, 『안씨가훈』의 직접적인 인용은 거론하고 있지 않다. 이는 『안씨가훈』은 풍속 교화의 유용성 외에 호불(好佛)의 혐의가 있었던 가훈서였으므로, 의도적으로 제외한 것으로 전제했다. 이와 같은 구도는 의고적 인용 방식(參-依-選) 가운데 참고[參]를 활용하면 해소가 가능하다. 양자의 변모에서 형태는 ‘소주제 다설명’에서 ‘다주제 소설명’으로, 내용은 「거가계」를 계승했으나, 후취(後娶)(4편), 면학(勉學)(8편), 생사(省事)(12편) 등을 상징하는 요소가 새롭게 등장한다. 곧, 참고[參]의 방법 아래 박하담의 「가훈십조」는 『안씨가훈』의 수입으로 인한 초기의 변모상을 명확하게 드러내며, 동시에 집필년도(1560)가 밝혀진 가훈이라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한편 『안씨가훈』과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 가훈 가운데 강덕후(姜德後)의 『우곡선생훈자격언(愚谷先生訓子格言)』(1668)을 살펴보았다. 『우곡선생훈자격언(愚谷先生訓子格言)』이 서설에서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저본으로 지적한 점을 세부적으로 고찰하였다. 『우곡선생훈자격언』에서 반영된 형태는 ‘다주제 다설명(가훈서)’이었다. 내용은 수신-제가 가운데 치국의 요소가 제외되었고, 인용된 편목 내에서도 『성학집요』의 세부 항목에 치중하여 반영되었음을 확인했다. 이는 성학(聖學)에서 가훈(家訓)을 목적으로 하는 책으로 변용되는 과정에서 겪는 변화상인 것으로 추정한다. 또한 『안씨가훈』과 「가훈십조」가 제가 → 수기의 측면으로 서차가 구성되었으나, 『우곡선생훈자격언』에서는 그 반대의 노선을 택했다는 차이점이 있다. 한편 『우곡선생훈자격언』은 이이(李珥)가 남긴 다수의 계훈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학집요』를 저본으로 삼았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는 당시 예송 논쟁과 우율 종사 등 극심한 당쟁의 여파에서 진주 강씨의 서인적 정체성을 확고히 하려는 정치적 선택일 것이다.
요컨대 「거가계」에서 「가훈십조」(1560)로의 변화는 『안씨가훈』을 내용과 형식 면에서 참고[參]를, 『우곡선생훈자격언』(1668)은 『안씨가훈』을 가훈의 전범(典範)으로써 참고[參]하고, 『성학집요(聖學輯要)』를 형식과 내용 측면에서 의거[依]의 측면에서 반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