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수도 한성에 외국인이 공식적으로 입성하기 시작한 것은 1880년대 들어서였다. 이들은 모두 한양도성을 통과하여 한성에 이르렀고, 이 과정에서 북한산과 한양도성을 직접 보고 경험했다. 대체로 서구인의 한양도성 경험과 기록은 조선의 개항/수교와 맞물려 이뤄졌다. 근대변혁기 서울을 왕래하거나, 주재한 모든 사람은 한양도성 입성을 경험함으로써 ‘도시의 경계’, ’도성의 관문’이라는 속성을 인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왕궁과 도성으로 구성된 조선-한국의 상징적 경계 공간이자, 울타리라는 이중성을 이해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생활하거나 여행한 많은 서구인은 서울을 둘러싼 내사산(나아가 외사산과 서울 입경 도중의 주요 산)을 조망했다. 특히 북한산은 산세를 이용하는 한양도성의 가장 상징적 배후로 여겨졌으며, 산과 성곽으로 이어진 한양도성은 ‘산세를 활용한 요새’이자. ‘성곽으로 이어지는 산책로, 자연공원’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도성체계가 더 이상 기능하지 않는 성곽의 근대의 기능은 다른 방식으로 발산되고 있었다. 즉 자연과 어우러진 성벽길이 이제는 산길로서 역할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근대격변기 도성의 역할 변화는 지금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많은 서구인들이 보편적 관점에서 동아시아의 성곽과 한양도성을 비교하고, 서울의 자연환경과 한양도성의 입지적 특징, 한양도성-탕춘대성-북한산성으로 이어지는 방어체계를 이해했다.
근대 이후 수도 한양을 방어하던 한양도성의 역할은 사라졌다. 생활인으로서 많은 서구인, 일본인은 북한산 하이킹을 즐기고, 이로써 더 이상 성곽의 기능은 사라졌지만, ‘서울 입성’이라는 심리적 인식과 주요 대문으로 구획되는 물리적 공간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전통적 방어체계의 산물’로서의 역사성과 ‘서울의 경계이자 상징공간’이라는 속성은 변치않고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