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10월말 상하이로 망명한 그는 독립운동진영에 합류하여 한국독립당 상하이지부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4월 윤봉길 의거를 계기로 상하이를 탈출한 후에는 3년간 중국 지방정부 공무원으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중일전쟁을 계기로 임정 피난대오에 합류한 이래 그는 임정 및 광복군의 운영 실무에 참여하였고, 임시의정원 의원과 외무부 직원 등으로 중국기관 등을 상대로 한 선전·외교 업무를 맡았다. 대한제국 지배층 집안 출신으로 갖춘 유교적 교양과 중국 지방정부 관리로 근무할 수준에 이르는 중국어 능력 등이 이러한 역할을 가능케 하였을 것이다.
그는 한국독립당의 임정 주도에 도전하는 세력을 ‘기회주의 공산당 무리’라고 비판하는 완고한 입장을 견지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기 국제정세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는데, 제국주의와 파시즘은 곧 소멸될 것이고, ‘민주 아시아’의 건립이 최대의 과제로 대두하고 있다고 전망하였다. 또 그는 미국이 임정을 승인하면, 중국이 임정을 자신의 의도대로 끌고 가려는 야심을 드러낼 수 없을 것이라고, 중국정부의 과도한 요구와 간섭을 경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