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암 신태식은 경북 문경 출신의 의병장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한말 후기의병에 참여했고, 망국 이후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을 조직해 서로군정서와 연계하여 독립운동을 펼쳤다. 의병항쟁을 했던 인물들은 대부분 일제에 체포되어 교수형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신태식은 출옥하여 독립운동으로 활동을 이어가는 인물이다. 이는 신태식의 의병항쟁이 어떠한 특징을 지니고 있기에 의용단 활동으로 연결되는지에 대한 의문점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신태식 의병부대의 특징이 다른 부대와 어떤 점이 다른지, 나아가 그 특징이 출옥 이후의 행보와 어떤 연결 지점이 있는지 파악해 보고자 하는 데서 비롯한 것이다.
신태식 부대는 전투를 주목적으로 수행하는 전투부대라기보다 지원활동에 중점을 둔 병참활동 부대로서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병력모집, 군자금 모집 및 군수품 확보, 그리고 일본군의 소규모 병참 공격 등이 해당한다. 덧붙여 「창의가」에서 확인되는 신태식 부대의 세 가지 측면은 지원부대로의 특징을 뒷받침하고 있다. 전투방식, 행군방식, 그리고 군수활동이 주목되기 때문이다.
먼저 전투방식을 살펴보면, 『창의사실기』에서 확인되는 이강년 부대는 대개 일본군과 전투할 때 적의 접근 소식과 그에 따른 매복 전술로 전투를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신태식 부대는 다른 부대와 합진하거나 장기간 주둔한 것을 제외하면, 해당 부대가 일본군을 상대로 단독 전투를 치르거나 매복하여 일본군을 기습했다는 기록을 찾기 어렵다. 신태식 부대가 일본군의 동향을 정탐한 뒤에 단독적으로 공격한 활동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행군방식을 살펴보면, 신태식 부대는 목표 지점을 향해 가는 경로나 주요 길목에 척후를 먼저 보내어 일본군을 피해 가는 방식으로 행군하고 있다. 행군로를 보면, 신태식 부대는 일본군과의 교전을 피하면서 경기도 양주로 향하고 있다. 신태식 부대의 이동 경로로 볼 때, 신태식이 이강년 부대의 후군장이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는 앞서 서술했듯이 신태식 부대의 전략적 수단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신태식 부대의 행군방식은 얼마나 일본군과 맞닥뜨리지 않느냐가 관건이었고, 이는 해당 부대가 지원활동에 무게를 두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군수활동을 보면, 「창의가」에서 신태식 부대가 병력을 모집한 내용과 지역관청에서 군수물자를 확보하거나 주둔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이 나타나고 있다. 단지 신태식 부대가 모집한 병력 수만 확인된다. 병력 수가 적게는 100여 명부터 많게는 1,000여 명에 이른다. 그런데 신태식 부대가 소모한 병력 숫자가 1,000여 명에 달했다는 내용은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태식 부대가 특정 지역을 사수할 목적이 아니라면, 병력을 대규모로 유지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병력은 앞서 언급한 행군방식과 빗대어 볼 때, 일본군의 감시망 회피를 위한 전략으로 추측된다. 1,000명이라는 숫자는 일본군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