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 총액에 대한 전통적인 규제는 이자가 원본을 넘지 못하도록 하는 ‘일본일리(一本一利)’의 법이라 할 수 있다. 이는 20세기 초 이자 제한에 관한 근대적 단행 법률인 대한제국의 ‘이식규례(利息規例)’에서 명문화되었다. 이식규례(利息規例)에는 최고이자율을 정하면서 이자의 총량 억제에 중점을 두었을 뿐 ‘간주이자’ 규정을 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조선에서는 각종 수수료나 대출사례금 또는 선이자(先利子) 공제 등의 관행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에서 각종 수수료나 대출사례금 또는 선이자(先利子) 공제 등의 관행이 나타난 것은 우리나라 통상 자주권이 훼손당한 1876년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체결 이후부터다. 제일은행 등 일본계 은행과 함께 대금업자들이 조선에 진출하면서 기한(期限), 이자(利子), 전당물 보관 방법 등에 관하여 대금업에 관한 일본의 특수한 관습을 조선에 관철했다. 이와 함께 메이지 인플레이션을 배경으로 신용할당(credit allocation)이 이루어지면서 수요초과가 극심하여 선이자 수취나 대출사례금, 체당금 등의 대출 관행이 만들어지고 조선에 이식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각종 수수료는 물론이고 사례금이나 체당금, 선이자 수취의 관행은 일본 화폐의 통용과 금융시스템 지배라는 외적 조건과 결합하면서 조선인 채무자에 대한 약탈적 성격이 두드러졌다.
왜식 대부 관행의 이식과 함께 간주이자 규제도 1911년에 총독부령으로 이식규례를 대체한 ‘이식제한령(利息制限令)’에 의해 이식됐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흘러 메이지 시대나 한국전쟁 이후의 극심한 인플레이션이나 신용할당을 체감하기 어려운 요즘에도 간주이자 규제는 변함없이 그대로다. 조선조 대전속록(大典續錄)의 서문에서는 “만약 법이 오래 되면 폐단이 생기므로 마땅히 법을 개폐해야 할 때가 되었는데도 부질없이 구장(舊章)만을 지키고 변통하지 아니하면 교주고슬(膠柱鼓瑟)과 같을 것이니 어찌 숭상할 만한 일이겠는가”라고 하였다.
간주이자 규제를 이식한 일본에서도 수수료 기반의 영업모델을 제약하는 폐단이 생겨 적용 예외를 확대하고 있다. 우리도 간주이자 규제의 경제적, 사회적 배경이 달라진 만큼 변법(變法)을 모색하여 교주고슬(膠柱鼓瑟)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