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통감부 시기(1906~1910) 한국 내각과 통감부 사이의 정치회의인 ‘施政改善協議會’에 대한 연구이다. 시정개선협의회는 1906년 3월 13일부터 1909년 12월 28일까지 97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주요 참석자는 통감과 한국 대신들이었으며, 한국 국정 각 분야에 걸친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본 연구에서는 시정개선협의회를 중심으로 통감부 시기 일본이 한국 내정을 장악하는 과정을 규명하고자 했으며, 그 결과 다음의 내용을 규명할 수 있었다.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시정개선을 명분으로 협의회를 시작했으며 그 목적은 한국 내정에 관여하기 위한 것이었다. 1907년 제3차 한일협약 이전 협의회의 특징은 ‘시정개선’의 필요성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이토는 내각의 논의가 분열되지 않도록 하고자 했다. 1907년 5월 박제순 내각이 사퇴하고 이완용 내각으로 교체되었으며 내각 총리 이완용에게 권한이 집중되었다. 이후 시정개선의 당위성은 더 이상 표방되지 않았다.
1907년 한일협약을 분기점으로 협의회는 성격 변화가 나타났다. 1907년 9월 통감부 관제에 부통감과 참여관 직제가 신설되었고, 이들은 협의회의 구성원으로 편입되었다. 이와 함께 통감부 참여관회의가 구성되어 협의회와 연계성을 가지고 운영되었다.
그런데 1909년 6월 소네 아라스케 통감 임명 이후 통감과 참여관 사이에 균열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이때 협의회와 참여관회의의 연계성은 축소되었다. 그러나 통감부 내부의 세력 균열이 일제의 세력 약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참여관의 역할이 확대되면서 참여관들은 통감을 무시하고 그들만의 참여관회의에서 한국 정치를 논의했다. 소네가 일본에 귀국한 1910년 1월 이후 참여관회의는 개최되었으나 협의회는 중단되었다.
협의회의 소멸은 또 다른 통치체제의 형성을 의미했다. 그것은 총독부로의 전환, 즉 대한제국을 잠식한 통감부의 해체를 내포하고 있었다. 통감 통치의 종언은 본격적인 식민통치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