本稿では歌川重政を中心に論じた結果、次の新知見が得られた。 第一、1855年頃~1866年まで「歌川重政」と呼称した彼は、1867年に三代目広重になる。この襲名年度を調査する過程で、先行研究の書誌的事項の中で、製作時期、画工、襲名時期などを訂正することもできた。。 第二、歌川重政と一笑斎の関係を調べた。「えどのはなめいしょえ・せ・にばんぐみ・なかばし」を、1864年2月に「いっしょさい」と「しげまさ」が描いている。この二人については従来、同人とする説や別人とする説があった。本稿では次の結果を提案した。 その一、本『えどのはなめいしょえ』の「いっしょうさい」は、「ヒロ」の落款を捺しているので広重の門下である。「いっしょうさい つやなが」という署名がある「うたがわ つやなが」は広重ではなく、国芳の門下なので『えどのはなめいしょえ』の「いっしょうさい」ではない。 その二、「うたがわ しげつぐ」は広重の門下であるが、「いっしょうさい しげつぐ」という署名が見当たらない。従って、『えどのはなめいしょえ』の「いっしょうさい」は、今のところ、歌川重政の仮託した「いっしょうさい しげまさ」とみなすしかないだろう。
본고에서는 동시기에 활약하였던 세 명의 「시게마사」가운데 우타가와 시게마사를 중심으로 논한 결과 다음과 같은 새로운 견해를 얻을 수 있었다.
첫째, 히로시게에게 입문해서 1855년경부터 1866년까지 우타가와 시게마사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던 그는, 1867년에 히로시게의 양녀 오타쓰의 데릴사위가 되어 3대 히로시게를 습명하였다. 이러한 연도를 도출하기 위하여 조사하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이 선행연구를 보충 수정할 수 있었다. 즉, 「시게마사(重正攵 :政)」라는 서명 및 출판허가 공인도장(改印)에 의해 니시키에『光君名所合・杉田の梅』는 「1854년 제작」이 아니라, 「1866년 제작・우타가와 시게마사그림」이라는 점, 미타테 반즈케집『新会あづまの寿』는 「1863년경 제작・우타가와 시게마사 표지그림」이라는 점, 우타가와 시게마사는 1866년 5월(『東海道中滑稽膝栗毛』)까지는 히로시게를 습명하지 않았다는 점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