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3년 야고(也古)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몽골 제5차 침입군이 고려를 대대적으로 침공하였다. 제5차 침입군은 대몽전쟁기 중에서 가장 강력한 몽골 군단이었다. 몽골군 본진은 서해도의 양산성, 교주도의 동주산성·춘주성, 양광도의 양근성·천룡산성 등을 함락시키고 고려 중부 내륙 최대 거점인 충주를 포위하였다. 고려는 몽골군의 경상도 방면 진출을 막기 위해 충주에서 그들과 일대 혈전을 벌이게 되었다.
1253년에 낭장 김윤후(金允侯)는 충주산성 방호별감(防護別監)으로 파견되었다. 그의 직함으로 볼 때, 그가 파견된 곳은 충주읍성이 아니라 충주산성이 분명하다. 그런데, 1253년 당시 『고려사』에서 대몽전투의 현장은 주성(州城) 혹은 충주성으로 나온다. 충주성은 충주에서 거리가 가깝고 방어에 유리할 뿐만 아니라 조령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었던 대림산성일 가능성이 높았다. 방호별감 김윤후는 충주성에서 몽골군 본진 제1군에 맞서 70여 일 동안 항전하였다. 몽골군 총사령관 야고가 함께 종군하였던 탑찰아(塔察兒)의 군영을 습격하는 불상사를 일으켜 몽골 황제에 의해 몽골로 소환되자 전열이 흐트러진 그들의 침공을 가까스로 막아낼 수 있었다. 1256년 몽골 제6차 침입 때 몽골군에 의해 충주성이 함락되고 곧바로 충주산성이 공격당한 사례로 보아, 1256년의 충주성은 충주읍성이 분명한데, 1253년에도 김윤후에 의한 충주산성전투와 별개로 충주읍성전투가 전개되었다고 여겨진다. 이 때문에 『고려사』에서 ‘주성’은 용례에 따라 읍성 혹은 산성이 서로 혼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충주성전투에서 김윤후는 청야입보에 의거한 수성전을 기본 전술로 유지하면서도 출성전·매복전·야간기습전 등 변칙 전술을 가미하여 몽골군을 격퇴시켰다. 그는 충주성이 함락될 위기상황에 직면하여 다음과 같은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1)힘껏 싸울 수 있다면 귀천에 상관없이 관작을 내리겠다고 충주민에게 공언하였다. (2)관노 문서를 소각하여 관노들에게 신분해방에 대한 믿음을 보였다. (3)몽골군에게 빼앗은 소와 말을 군사와 백성들에게 나눠줘 그들의 항전의지를 최대로 끌어올렸다. 이러한 훌륭한 리더십을 발휘한 결과, 충주성 입보민은 결사항전하여 몽골군 본진을 물리쳤다. 충주성전투 승리로 인하여 군공을 세운 자는 모두 관작을 받았고 충주는 국원경(國原京)으로 승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