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조선 전기 기로소의 설치와 연혁을 살펴보면서 태조의 기로소 입소와 관련한 고사의 진위를 밝히고, 숙종연간 기로소 영수각의 조영 배경과 조영 시 모범이 되었던 건축 형식을 규명하는 것을 연구의 목적으로 한다. 연구를 통해 태조가 60세였던 1394년에는 기로소가 성립되어 있지 않았던 정황을 확인할 수 있으며, 태조의 기로소 입소 및 기로소 서루에 태조 어필이 제명되어 있었다는 고사는 사실이 아니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기영회는 15세기 후반에 절정기를 맞이하나 16세기 이후부터는 자주 중단되었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기영회 개최에 대한 임금의 재가가 잘 내려지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17세기부터 태조의 기로소 입소 및 기로소 서루에 대한 고사가 기영회 재개를 위한 명분으로 사용되기 시작한다. 숙종의 기로소 입소 시 기로소에는 임금을 어첩을 봉안할 적절한 시설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이에 어첩을 봉안하기 위한 새로운 건물이 필요했고, 종부시 선원각을 모범삼아 영수각을 신설하게 된다. 기로소 영수각은 현존하고 있지 않지만, 1904년에 기로소 영수각을 모범으로 삼아 건립한 의성 고운사 연수전이 남아있으며, 이를 통해 과거 기로소 영수각의 형식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