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파리 강화회의 이후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는 『講和會議所感』에서 ‘선전’의 중요성이라는 국제 정치의 새로운 움직임을 지적했다. 1934년 미국 國際文化協會의 회장으로 취임한 후미마로는 全亞主義를 내세우며 중국 본토 침략전을 강행하면서도 대외적으로는 영미를 의식한 문화외교 정책을 강화했다.
1937년 중일전쟁을 확대한 고노에 내각은 최승희의 미국 계약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며 미일 관계를 개선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후미마로가 문화외교 전면에 내세운 최승희의 조선무용은 프롤레타리아 예술을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후미마로의 반공 이데올로기와 상반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국이 급했던 후미마로에게 이데올로기는 중요하게 고려되지 않았다. 그는 최승희의 무용에 주입된 프롤레타리아 예술 ‘Poesie(詩想・詩情) 즉, 선전・선동성과 최승희의 강한 프로파간다로서의 자질에 주목했다.
한편 최승희는 세계 순회공연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예술 이론에 기반한 조선무용으로 조선의 진화되고 강인한 모습을 세계인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다. 이러한 최승희의 이데올로기는 그가 창작한 조선무용 고찰을 통해 증명되고 있다. 그러나 고노에 내각의 최승희 세계순회 공연은 미일 관계를 개선하기 위함에 그 목적이 있었고, 일본 ‘동양 제일주의’ 문화외교 방침으로 개시된 문화선전 공작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듯 고노에 내각이 문화외교 전면에 내세웠던 최승희의 세계 순회공연에는 제국 일본과 조선 프로 무용가 최승희 간의 융합될 수 없었던 상반된 이데올로기가 존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