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여상의 맹휴는 학생, 동창회는 물론 교사, 학부형, 학교당국과 사회단체의 입장과 지향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사건이다. ‘여성의 경제적 자립’을 주지로 하여 여성에게 실업교육을 실천한 경성여상에는 총 7차례의 동맹휴학이 발발하며, 학생운동의 흐름을 담아내고 있다.
1928년 맹휴에서 경성여상 학생들은 일관적으로 맹휴해결의 주도권을 갖고 행동했다. 맹휴 해결 과정에서 학부형회나 사회인사, 동창회 등에게 중재의 역할을 일임하는 다른 학교 사례와는 달리, 경성여상 맹휴생들은 주도권을 잡고 학부형회 각 사회단체, 학부형회는 물론 사회적 여론을 환기시키려 지속적인 노력이 돋보이는 사례이다.
격렬하게 진행된 1928년 경성여상 학생들의 맹휴는 전국의 학생들이 ‘광주 구속학생 석방’이라는 공통의 슬로건 아래 결집했던 경성여학생연합만세시위의 선경험이 되었다. 나아가 1928년 맹휴의 주인공들은 이후 1931년 맹휴 발생시 졸업생으로서 지속적인 지지를 보내고 지도의 역할을 하였다.
한편 1934년 경성여상의 맹휴는 경성여상 내에 존재했던 심계월, 박온, 차소영 등을 중심으로 좌익 독서회가 중심이 되어 일어났다. 경성여상 맹휴의 전개 과정 속에서 학생주체들은 식민지 교육제도의 구조적 모순을 정조준하며 항일적 성격과 사상적 색채를 점차 뚜렷이 해나갔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