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윤석과 어윤적은 화서학파인 김평묵과 유중교의 문인이다. 이들은 철저한 위정척사론을 지닌 유학자들로, 1883년 개화의 풍조가 널리 퍼져있는 서울을 피해 가족을 이끌고 지방으로 이주하였다. 어윤석은 충북의 진천으로 이주하여 목천에서 강학하였으며, 1896년 유인석의 제천의병에 아들 어경선과 함께 참여하였다. 그의 아들 어경선은 제천의병에 참전한 뒤 의병장 유인석을 따라 만주로 들어갔다가 1905년 귀국하여 청주 일대에서 강학하였다. 어윤적은 의병장 이강년과 김상태, 그리고 최익현의 문인인 곽한소 등과 교유했으나 의병에 참여하지는 못했다. 1910년 2월 가족을 데리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 本溪縣 堿敞으로 망명하였다. 그의 아들 어취선은 단발령이 내리자 지리산 속으로 들어갔다가 제천의병의 봉기 소식을 듣고 참전하려 했으나 이미 의병이 해산된 후였다. 1910년 차라리 죽을지언정 원수인 일본의 부림은 당하지 않겠다면서 망명 기지를 확보하여 구국의 길을 찾고자 부친과 함께 만주지역으로 망명하였다.
어취선은 감창에 거주지를 마련하고 부친과 함께 한약방인 東華堂을 차렸으며, 동생들과 함께 농지를 마련하여 생계의 방도로 삼았다. 감창에서 자리를 잡은 그는 자신의 집을 국내에서 오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연락 거점으로 활용하였다. 그는 이를 위해 신혁희 등과 就正契를 조직하여 자금을 마련하였다. 그의 집에는 대한독립단 도총재 박장호와 부총재 백삼규를 비롯하여 통군부의 총장 채상덕, 의군부 군무부장 전덕원, 그리고 통의부 재무부장 지광운 등 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이 방문하였다. 또한 그는 유인석과 그의 문인들이 거주하고 있던 平頂山鎭을 비롯하여 서간도 지역의 각지를 자주 왕래하며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였다. 그는 독립운동들에게 거처와 숙식 제공은 물론 연락 활동과 군자금 지원 등의 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함종어씨가의 화서학파 문인들은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여 의병전쟁에 참전하였으며, 구국의 방도를 구하고자 만주 지역으로 망명한 후에는 조선의 후예임을 자부하면서 독립운동가들에게 거점을 제공하고 군자금 제공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위정척사론에 기반하여 강인한 반일투쟁을 전개한 점에서 지행합일을 실천한 유학자들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