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에 동래부는 주요 군사요지요 일본과의 무역 거점이었지만 전통적인 사족세력의 성장이 미약해 사회문화적으로는 주변부 지역이었다. 이러한 동래부의 외곽수변 지역이었던 사천면에서 임란 직후에 이서와 무임 등 중간 계층이 중심이 된 面 단위 지역 엘리트들의 모임인 洞契가 만들어져 운영되었는데 이 조직이 실제로는 面契에 해당하였다. 이 조직은 계원간의 친목과 상호부조뿐 아니라 면에 부과된 잡역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17세기 후반에 동래부사가 주도해 향약을 실시하면서 그 하부 조직으로서 면단위의 동계를 새로 조직해 운영하였다. 그러다 18세기 중엽에 또 다른 동계(실은 면계)가 나타나 그 이전의 동계의 전통을 이었다고 주장하면서 수령향약 아래의 하부조직인 기존의 동계와 병존하였다. 이 연구는 18세기 후반 이 두 동계의 병존양상을 살펴보고 그 사회사적 의미를 파악해보고자 한 것이다.
이 연구는 상이한 이 두 동계의 구성원들을 조사해보았는데 비향약계열 동계의 구성원들 중 절반에 가까운 이들이 향약계열 동계에도 참여하고 있었다. 이러한 구성은 상이한 이 두 동계 사이의 관계가 대립적이지 않고 상호 보완적이거나 부속단체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연구는, 다른 대부분의 성씨들과는 달리, 본관과 계통을 같이하는 친족집단인 趙氏에 주목해 보았다. 이들은 중상급 무임을 다수 배출한 가계인데 다수가 향약계열의 동계에 참여해 계원으로서의 특권을 사족들과 같이 향유하면서도 이들 중 상당수가 비향약계열의 동계에도 적극 참여해 면에 부과된 잡역 문제의 해결을 주도하였다. 이렇듯 이들이 향약계열의 동계에 다수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족들의 불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향약계열 동계 구성원들 내부의 門地에 따른 각종 차별을 철폐해갈 수 있었다. 이러한 중간계층이 조선후기 지방의 지역사회를 이끌어간 주력이었으며 왕조 번영의 토대가 되었다고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