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강진희(姜璡熙, 1851∼1919)의 「일소헌방소악부(一笑軒仿小樂府)」를 학계에 처음 보고하기 위해 씌어졌다. 저자인 강진희는 본디 의관(醫官) 집안 출신이었으나, 역과(譯科)에 응시하여 왜어(倭語) 역관이 된 인물이다. 강진희 인생에서 가장 특별한 장면은 1887년 11월 조선의 초대 주미공사(駐美公使) 박정양(朴定陽, 1841∼1905)의 수행비서가 되어 미국 워싱턴의 주미조선공사관에서 1889년 2월까지 1년 남짓 근무한 경력에서 비롯되었다. 그곳에서 미국 풍경들을 수묵화로 그렸는데, 이는 우리나라 사람이 그린 최초의 미국 풍경이다. 서예에도 조예가 있어, 말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학교인 서화미술회(書畫美術會) 강습소에서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 1861∼1919), 소림(小琳) 조석진(曺錫晉, 1853∼1920) 등과 함께 학생들을 가르쳤다. 때문에 그 동안 강진희에게 관심을 가진 분들은 미술사학자들이었으며, 2022년에는 강진희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두 차례의 전시가 열리기도 하였다.
「일소헌방소악부(一笑軒仿小樂府)」는 강진희가 자하(紫霞) 신위(申緯, 1769∼1747)의 「소악부사십수(小樂府四十首)」를 본받아 시조 46수를 한시(漢詩)로 옮긴 작품이다. 그 이전의 소악부가 대체로 노래를 듣고 한시로 옮겼다고 추정되는 데 비해, 강진희는 1913년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이 엮어서 신문관(新文館)에서 출판한『가곡선(歌曲選)』을 읽다가 그 중에서 주로 무명씨(無名氏)의 작품을 번역하였다.
이미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 과거 제도가 폐지되고, ‘국문(國文)’의 시대가 시작된 지 20여 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강진희는 국문시가(國文詩歌)를 한시로 옮긴바, 그의 의식 속에서 이 작업은, 오늘날 우리의 관점과는 다르게, ‘속(俗)’을 ‘아(雅)’로 바꾸는 일이었다. 그런데, 선택된 작품은 남녀 사이의 사랑이나 취락(醉樂) 같은 통속적인 내용들의 비중이 높으며, 노골적인 육정(肉情)을 다룬 작품도 포함하고 있다.
양반들의 전유물이었던 한시, 그 중에서도 국문시가를 한시 형식과 미학에 맞게 재창조해야 하기 때문에 보기와 달리 짓기가 녹록치 않은 소악부가 여항인들에게까지 확대된 점에 문학사적 의의를 부여할 수 있다. 다만 근대 민족국가 수립에 실패하고, 민족 수난기가 이미 시작된 점을 생각해 보고, 다시 ‘국문의 시대’가 이미 열렸던 점을 고려해 보면, 그 한계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강진희의 이 작품이 한문학 전통의 구심력이 여전히 강하게 작용하는 상황을 생생히 증거한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