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의 서손자이자, 사도세자의 서자, 그리고 정조의 이복동생으로 태어난 은언군(恩彦君) 이인(李䄄)은 제25대 왕인 철종(哲宗)의 조부이다. 조선후기 왕위계승과 관련하여 그의 집안은 계속 엮이게 되었고, 그로 인해 그의 일생은 순탄치 못하였다. 그 시작은 편애가 심한 영조의 첫 서손자로 태어난 것이었다. 사도세자가 궁녀에게서 본 첫 서자가 바로 은언군이었기에, 영조에게 있어 그는 세자의 방탕함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임오화변 이후 그는 궁에서 나가게 되었으며, 풍족하지 못한 환경에서 자라게 되었다. 영조대 홍봉한과 관련되어 ‘황경룡 사건’이 벌어져 시전 상인들에게 외상을 하고 갚지 않았다는 이유로 동생인 은신군과 함께 제주도로 유배가게 된다. 이것이 그의 첫 유배였다. 하지만 은신군의 죽음으로 그는 유배에서 풀려나게 되었고, 이후 정조의 즉위와 함께 왕의 형제로 대우받게 되었다. 은언궁방에서 시전상인들에게 외상하고 갚지 않은 일, 궁방에서 일하는 이들의 공갈 등 조용할 날이 없었다. 하지만 정조의 비호 속에 무탈하였고, 정조는 그에게 각별한 우애를 보여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순왕후를 비롯한 벽파 등의 정치세력에게 더욱 공격받게 되었다. 그의 아들인 상계군(常溪君)은 정조 재위기에 ‘구선복 역모사건’에 연루되었고, 이로 인하여 은언군 일가는 강화도로 유배가게 된다. 역모죄에 연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양과 가까운 강화도로의 유배는 정조의 우애를 보여주는 것이자, 반대세력에게 국왕의 힘을 보여주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정조 사후, 신유박해 당시 처와 며느리가 천주교 신자임이 드러나 이에 연루되어 결국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후 순조대에도 역모와 연루될 뻔 하였으며, 헌종대에는 그의 손자가 역모에 추대되었다는 죄로 사사당한다. 그리고 헌종이 후사없이 죽자 대왕대비였던 순원왕후에 의해 철종이 등극하게 된다. 철종의 즉위 이후 그의 신원과 명예가 회복된다. 이처럼 조선후기 왕위문제를 둘러싼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의 연속이었던 은언군의 삶을 고찰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