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燕行詩軸』은 저자인 金勉柱(1740~?)가 1798년 三節年貢兼謝恩使行의 副使 자격으로 북경에 다녀오는 과정에서 지어진 작품이다. 당시 정사는 李祖源(1735~1806), 서장관은 徐有聞(1762~1822)이었다. 1798년 10월 19일부터 이듬해 4월 2일까지 총 160일에 걸친 여정이었다. 그 과정에서 지은 시를 모은 것이 『燕行詩軸』이다. 여기에는 연행시 51제 61수가 실려 있으며 마지막 부분에 김면주의 삼촌인 金漢祿(1722~1790)의 연행시 1수가 추가되어 있다.
『연행시축』에 실린 작품은 연행을 떠난 이후부터 귀국하여 復命할 때까지 이동한 장소의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 연행의 각 지점에서 일어난 感興과 風光에 대한 감상을 읊은 작품, 동료의 작품에 차운한 작품, 역사적 사건에 대한 懷古나 對明義理를 드러내는 등의 작품이 실려 있다. 그는 청나라에 대해 ‘비린내 나는 오랑캐’로 인식하고 있으며 그와 관련된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당시 연행을 떠나면서 동료와 친지들이 써준 『燕行贐章』이 남아 있고 서장관 徐有聞이 지은 『戊午燕行錄』이 있어, 세 자료를 함께 살핌으로써 연행의 양상이 더욱 구체적으로 확인되며, 그 이면에 숨어있는 의미도 확인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연행시축』의 특징적 국면을 동료와 酬唱과 次韻, 건륭제의 사망과 대응, 귀국의 기대와 실망이라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았고, 연행에 대한 이중적 태도가 나타나는 원인을 분석하였다.
서유문이 지칭한 ‘燕行한 分義’는, 연행가서 북경을 구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말이다. 김면주 역시 이에 대해 크게 반발하지 않았다. 적어도 三使를 제외한 대부분의 연행 참여자들은 황제의 喪事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북경의 관광을 한껏 즐기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삼사는 ‘체면’을 지키고 있으면서 ‘조선의 사신은 예의를 안다’는 말을 굳건히 지키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국가의 이익을 가져오는 행동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이 ‘禮儀之國’으로 자리매김함으로써, 청나라는 이를 우대하였고 예물을 절반으로 줄이는 등의 조치가 여러 차례 있었다.
삼사와 별개로 그 이하의 인원들은 상당히 자유롭게 북경을 관광하였고, 많은 청문인들과 교유를 나눴다. 그 과정에서 황제의 상중이었음에도 술에 잔뜩 취해 일어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외부적으로는 체면을 차리면서도 실제로는 관광과 인적 교류에 제한이 없는 이중적인 태도를 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