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유럽 의회의 전자인격 지위 발의를 계기로 촉발된 인격 개념 논쟁에 소통 체계이론의 관점에서 개입한다. 전자인격 지위를 주장하는 논자들이 기계의 인격화를 시도하는 이유는 기계에 민사적 책임을 귀속시키기 위한 것이므로, 기존의 논쟁 구도에서 속성 실재론 등 인간성 중심 인격 개념을 원용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그리고 동물의 권리 논의로부터 이어지는 보호 중심의 관계론적 접근은 기계의 피동자 지위에 주목하기 때문에 일단 제쳐 놓아야 한다. 그래서 관계론적 접근의 일종이며 책임의 문제를 다룰 수 있는 루만(N. Luhmann)의 소통 체계이론과 그것의 인격 개념은 비인간의 인격화 가능성을 다룰 때 적합하다.
그런데 시간 간격을 둔 여러 소통 맥락들에서 사회적 동일화를 이룰 수 있어야 하며, 저자, 주소지, 주제의 통일성을 강조하는 루만의 인격 개념에 따를 경우 언어 능력을 가진 딥러닝 알고리즘의 인격화는 불가능하다. 이 한계는 루만의 소통 개념을 알고리즘과의 인공소통으로 확장한 에스포지토(E. Esposito)의 연구를 참조할 때 명확히 드러난다. 인공소통에서 기계는 소통의 통지자로 등장할 뿐 이해하는 자로 등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성원 자격을 기초로 결정 소통을 하는 조직들에 부여되어 있는 법적 인격성을 기계에 부여하는 것은 규범적 기대를 훼손하기 쉽다.
이러한 검토 과정을 거쳐 필자가 내리는 결론은 다음 세 가지이다. 첫째, 기계의 인격화를 기술적으로 실현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둘째, 인격화의 기술적 실현을 위한 노력이 효율적 기술 발전과 양립하기 어렵다. 셋째, 인격화를 위한 기술적 노력과 전자인격 지위 부여는 법의 기능인 규범적 기대의 안정화를 훼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