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색(1328~1396)의 고려왕조사로서 삼한사 인식은 조선씨→기자→삼국→고려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그는 3대 부계로 구성된 단군신화를 알고 있었지만, 신이와 괴력난설의 중간 지점인 비괴(秘怪)로 이해했다. 이것은 그에게 고조선의 건국시조를 단군으로 지칭하지 못하고, 조선씨(朝鮮氏)로 얼버무리게 했다. 그 대략은 “당요 무진년에 조선씨가 건국하여 천여년을 지속한 후 기자가 계승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또 ”단목(檀木) 아래로 내려온 신인(神人) 단군을 국인(國人)이 추대하여 왕이 되었다“는 『응제시』 유형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의 이해라고 파악된다. 고려 말부터 성리학을 수용한 신흥유신들 사이에서 단군전승의 합리적인 인식을 위한 노력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는 고려 전·중기의 다원적 천하관이 원과의 관계 속에서 형세문화론적 화이관으로 변한 시대를 살았다. 두 명의 천자가 공존하여 천하관의 중첩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기자 인식은 소중화와 불신론(不臣論)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에게서는 동아시아 보편문화인 사대관계에서의 소중화론과 독자적인 영역과 문화를 지칭하는 불신론이 공존할 수 있었다. 그 중심에는 고조선(조선씨)을 문화적인 측면으로도 확대·이해하여 유교적 문명론을 지향하는 ‘삼한인수군자국’에 대한 관념이 자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