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에 있어서 조선과 일본의 교류는 1711, 1719, 1748, 1764년의 4회에 걸친 조선통신사 일본방문의 기록 및 필담 창화집을 통해서 그 실태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는 일본의 문치 100년이 지난 시기여서 양국의 학문적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져 많은 필담 창화집이 성립되었다. 단 양국의 선린 우호를 위한 교류의 이면에는 학문적 경향의 차이에 따른 해석상의 문제, 역사 인식의 차이, 상호 불신감 등이 작용하여 타자 인식에 대한 차이를 엿볼 수 있다.
중국 명나라의 멸망(1644년)에 따라 화이질서가 붕괴되는 「화이변태」가 발생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양국 사이에는 학문적 주도권을 다투는 경향이 빈발한다.
조선은 중국 송대 이후로 명에 의하여 계승되어온 주자학(송학, 정주학, 성리학)을 국시(國是)로 하고 있어, 명을 계승한다는 「소중화 의식」에 입각한 화이질서의 유지라는 자세로 교화(敎化), 교환(交歡)의 각오로 임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일본의 학사, 특히 오규 소라이를 비롯한 고문사학파 문사들은 자국 학문의 융성함을 주장하며 「문운흥륭」의 전이가 이루어져 일본에 의한 학문의 주도를 주장하는 소위 「일본형 화이의식」이 발현된다.
이와 같은 경향은 소라이를 비롯한 고문사학파 문사들에 의하여 시작된 것이지만, 18세기 중엽에는 유파와 관계없이 확산되고 증폭되어 가는 것이다. 이어서 「일본형 화이의식」은 한발 더 나아가 친선 우호를 위한 외교사절인 조선통신사를 조공사절로 격하시키기에 이른다.「신공황후의 삼한 정벌」전설의 도입과「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전쟁」과를 결부시켜 「조공사의 방일」로 해석하는 도식이 형성되고 확산, 고착화되어가는 것이다.
18세기 일본의 학문은 가숙, 사숙, 번교 등의 교육기관을 통하여 다양한 교과목을 학습한 인재가 배출되어, 학문의 유파라는 점에 있어서 학문적 다양성을 확보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오규 소라이에 의하여 발현된 학문적 우월 의식은 그 출발점이 굴절된 것이어서, 확증편향에 의한 주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