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은 조선후기 이후 발달한 상업지역이다. 구한말 2개의 시장을 운영하며 조선의 3대 시장으로 성장했다. 강경에는 금강수운을 중심으로 충남과 전북의 물산이 대거 모였다. 이로 인해 객주와 상인들이 일찍부터 성장했다. 토착적 재지사족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자산가들의 영향력이 컸다. 자산가들의 경제력은 강경지역 사회운동의 물질적 기반이 되었다.
본고에서는 1920년대 강경의 사회운동 중 소년, 학생, 노동, 여성, 형평 분야를 살펴본다. 소년운동은 ‘새로운 시대’의 ‘신인력’ 육성을 목적으로 강연회나 동화구연회 등을 개최를 통해 진행되었다. 그러나 1926년 결성된 북극소년단 이후 특별한 활동이 보이지 않았다. 학생운동은 서울, 호서, 도쿄 지역 학생들의 강연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에 고무된 강경지역 학생들은 강연회를 구성하기도 했다. 한편 민족차별과 교육차별에 저항하는 동맹휴학을 전개하고, 독서회 등 항일적 단체를 결성했다. 노동운동은 형평운동과 함께 상당히 활발했다. 이는 청년단체와 긴밀한 연관을 가지며 전개되었다. 노동운동은 노동야학 설립에서 시작해 배달부조합, 고용인친목회 등의 조직으로 이어졌다. 비록 1920년대 중반 이후 노동단체가 양분되었으나 노동자들의 이권 보호를 위해 매진했다. 여성운동은 그리 활발하지 못했다. 기독교 여성교인들을 중심으로 야학을 설립해 운영했으나 순탄하지 못했다. 형평운동은 강경형평분사가 설립되면서 전개되었다. 이들은 형평사원의 경제권과 인권 보호에 주력했다. 교육, 여성운동도 인권 향상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형평사원 자녀들을 위해 야학과 유치원을 설립하고, 형평여성동우회를 조직했다. 그러나 강경의 노동운동이 일감 확보와 조직내 주도권 장악에 치중하고, 형평운동은 신분차별과 경제적 이권 확보에 집중하면서 일제 침탈에 대한 적극적인 항일운동으로 진전되지 못했다.
이를 통해 1920년대 강경에서 노동운동과 형평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반면 소년운동과 여성운동은 계몽적 활동 이외에 적극적인 활동이 많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