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태수는 1907년부터 1911년까지 충청·전라·경상도를 중심으로 활약한 정미의병기의 대표적 지역 의병장이다. 본 논문에서는 문태수의 의진 운영과 전략·전술을 살펴보았다.
일제를 토벌하고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던 문태수는 전력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꾸준히 병력과 무기를 모았으며, 주로 기습을 통해 일본군의 병참과 치안을 끊임없이 위협하였다.
이 과정에서 의진을 크게 전투조직과 지원조직으로 나누었으며, 특히 지원조직은 전략·군량·무기·소모로 나누어 운영하였다. 물자와 병력은 성인 남성을 대상으로 권유하는 방식으로 모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납거와 같은 방식도 쓰였던 것 같다. 한편 무기는 화승총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고 일부는 군도와 양총을 사용하였는데, 주로 징발을 통해 조달하면서 때로는 일본군을 습격하여 획득하거나 아니면 경성에서 구입하기도 하였다. 이외 무기 수리와 탄환 조달을 위해 이를 담당하는 부하를 별도로 두고 있었다.
문태수 의진의 규모는 많을 땐 200명까지 확인되며 추정치이지만 1,000명까지 언급된 부분도 있었다. 그리고 1909년까지 줄곧 증가하던 병력은 1910년을 기점으로 급격히 감소하기 시작하여 그해 중반이 되면 10명대로 크게 감소한 정황도 확인된다.
문태수의 부하들은 「判決文」과 기타 자료를 통해 72명의 실체를 추출하였는데, 그 주축 연령대는 20~30대였고, 대부분이 전북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의진의 뿌리가 전북에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참여자의 직업은 농민의 비율이 가장 높았지만 정미의병기 의진답게 해산군인 출신도 3명이 확인되고 있었음은 주목할 부분이다. 이외 문태수는 항전을 위해 민심의 획득을 대단히 중시했으며, 그 결과 무주 지역에서는 신처럼 추앙받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