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靑邱 金雨英의 도일유학시기부터 안동부영사로 재직했던 1920년대까지의 흐름을 따라가 김우영의 독립운동 변호와 안동부영사 당시 활동을 평가하고자 하였다. 김우영은 경남 동래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신문물을 받아들였다. 일본유학 초기에는 반일감정을 드러내었지만. 상해에서 서양인들의 횡포를 목격하면서 생각의 전환점을 맞았다.
이후 김우영은 천황을 긍정하고 조선총독부를 비판하는 글을 일본인 잡지에 실었다. 다만, 잡지의 독자층이 일본인이기 때문에, 독자층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조선 청년이 처한 현실에 공감을 얻는 방법으로 택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김우영은 교토조선인유학생친목회가 창립되고 간사로 활동하며 기관지 『學友』를 발간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교토에서 김우영의 위상과 지도자적 면모를 보여준다.
귀국 후 김우영은 안동부영사로 부임하기 전까지 ‘만세 변호사’로 활동하며 3·1운동사건, 대동단사건 등 굵직한 독립운동 사건을 변론하였다. 치밀한 김우영의 변론은 조선인들에게 인지도를 높였다. 높아진 인지도는 조선총독부의 문화통치 수단으로 활용되어 김우영이 조선인 안동부영사로 부임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김우영은 유일한 조선인 안동부영사로 활동하였다. 그는 부임 초기에 의열단원을 돕거나 아내인 나혜석의 독립운동 조력을 묵인하였고 이주 한인들이 일본 외무성 보호 아래에서 생활하는 데 만족할 수 있도록 협조하였다. 하지만 이주 한인의 이주환경은 개선되지 않았고, 오직 독립운동에 대한 단속과 탄압만 강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김우영은 구미여행 중 뉴욕에서 김용하에게 습격당하며 친일파로 낙인찍혔다.
해방 이후 김우영은 자택에서 반항하지 않고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지만,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그가 억울함을 호소한 이유는 제국 일본 아래에서 순응한 것이 ‘자신의 이익만을 챙긴 친일파’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김우영은 스스로 조선 민족을 위한 ‘실리’를 추구했다고 생각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친일 협력을 합리화하였다. 그런데 그가 생각했던 교육과 산업의 개선은 어디까지나 일본의 통치 아래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이는 그가 친일이라는 낙인에서 벗어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