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악부 나손본(건)』 각조음 항목 수록 작품들을 살펴보면서 각조음이 갖는 의미를 살펴보고, 그것을 통해 『악부 나손본(건)』의 가집사적 위상을 보강하고자 했다.
『악부 나손본(건)』에는 이전부터 가곡창으로 불리던 작품이 시조창 형식으로 “각조음” 항목 아래에 나타남을 살펴볼 수 있다. 원래 가곡창으로 불렸던 작품이 시조창으로 불렸던 것은 충분히 다른 곳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현상이긴 하나 『악나(건)』의 시조창 형식 작품들로 가곡창으로 불리던 작품이 시조창으로 불리는 중후를 포착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흥비』의 영향을 받아『흥비』의 이본이라는 평가를 받는『악나』에 『흥비』에 수록되지 않은 작품들이 수록되고, 그 작품이 각조음이라는 항목 아래에서 시조창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과 그 작품의 일부가 시조창 가집 『남태』에서, 가곡창 가집『가곡원류』에서 등장한다는 것은『흥비』의 영향을 받지 않고 다른 가집들의 영향관계 안에서, 혹은『악나』가 산생되던 가창 현장의 영향 하에서 시조창 작품들이 형성된 것으로 예상해볼 수 있다.『악나』가『흥비』의 이본으로서『흥비』의 영향 하에 있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흥비』 편찬자가『흥비』의 ‘각조음’ 수록 사설을 어떤 악곡에 맞춰 불러야 하나 고민했던 것처럼 『악나』 편찬자는『악나』의 ‘각조음’ 항목에는 악곡 선택에 대한 고민을 넘어 당대 가창 현장에서 가곡창과 시조창 중 어떤 것으로 불러야 하는지 명확하지 않은 사설들을 수록하여 사설 선택에 대한 자율성의 결과를 담았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악나(건)』 각조음 작품들을 살펴볼 때 『악나(건)』은 19세기 후반, 조금 더 세밀하게는 1860~80년대, 시조창과 가곡창이 각자의 장소에서 유행하고 있을 때, 잡가의 시대가 시작되기 전의 과도기적 현상을 보여주던 시기에 산생된 가집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