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최근 진행된 김성숙의 중국어 저술 발굴과 조사 상황을 정리한 글이다. 이번 조사를 통해 중국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된 김성숙의 중국어 저서·역서는 총 5권, 그리고 신문·잡지에 발표된 글 총 4편을 확인하였다. 『일본경제사론』은 원본을 찾았고, 『변증법전정』은 1938년부터 1952년까지 최소한 총 11차례 출판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하였다. 『중국학생운동』은 그동안 번역서로 알려졌는데 찾아보니 저서였고, 책 제목이 『반식민지국가의 학생운동』이란 이름으로 출판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외에 번역서 『민족의 사회주의론』과 저서 『조선민족통일전선문제』의 출판 사실도 확인하였다. 이외에 조사과정에서 중국의 신문·잡지에 발표된 4편―「조선 농촌에서 일본 금융자본의 억압」·「아시아 약소민족의 윤곽: 조선」·「항일전쟁과 동아시아 피압박민족」·「대적 선전에서 필요한 것」―의 글을 추가로 발굴하였다.
이번 조사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동시에 이루어졌는데 의미 있는 성과는 주로 온라인에서 나왔다. 따라서 현재 전산화되지 않은 김성숙의 중국어 저술 자료에 대한 조사는 기본적으로 누락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조사상의 한계를 염두에 두고 이번 조사 결과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이번 조사를 통해 김성숙과 김산의 입을 통해 나온 김성숙의 중국어 저술에 대한 기술이 대부분 사실이었음이 밝혀졌다. 「운암 김성숙선생 약력」의 경우 이미 대부분 저서와 역서를 본문에서 확인하였고, 『아리랑』의 경우 조사상의 한계로 일부만 확인되었다.
둘째, 조사 결과 김성숙이 19세기 말부터 1992년 한중수교 전 중국에서 활동했던 한국인 중 중국어 텍스트를 통해 중국인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한국인임이 밝혀졌다. 최소한 총 11번 이상 인쇄가 진행된 『변증법전정』으로 확인되듯 번역가로서 김성숙이 남긴 흔적은 20세기 중국에서 활동했던 지식인 중 최고였다. 또 학자·사상가로서 김성숙은 1932년 개교한 광시사대에 초빙될 만큼 학문적인 성과도 인정받았다.
셋째, 김성숙은 일반적인 항일투사와 구별되는 다른 면이 있었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확인되었다. 김성숙은 중국인 아내 두쥔훼이와 함께 중국인의 조직인 중국좌익작가연맹, 중국광서사범대학 등에서도 활동한 독립운동가로, 무엇보다 활발한 중국어 저술 활동을 통해 중국 전역에 영향을 미쳤다. 이는 김성숙이 ‘개인적인 욕망’의 실현과 독립운동을 크게 분리하지 않은 실용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음을 증명하는데, 이러한 입체적 성격과 행동반경을 가지고 있었던 김성숙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이 필요하지 않나 질문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