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의 목적은 새로 발굴한 필사본 『불우헌유고(不憂軒遺稿)』의 문헌 특성을 밝히고 〈상춘곡(賞春曲)〉의 작자 문제를 재론하는 데 있다.
2장에서는 필사본 『불우헌유고』의 서지에 대해 고찰했다. 필사본 『불우헌유고』는 1책, 세로×가로 32.5×21.5cm 총 38장(표지포함) 분량이다. 필사한 인물과 시기는 알 수 없다. 표제는 “不憂軒遺稿”이다. 표지 왼쪽 상단에서 흐릿하게 포착된다. 서발이나 행장, 묘갈명 등이 없고 국문시가와 산문을 한시 앞에 둔 것도 특이하다. 여백에 교정을 본 내용을 적어 놓거나 같은 작품이 둘로 나뉘어 수록되는 등 아직 정리되지 않은 흔적들이 곳곳에 보이는 것으로 보아 초고본에 가까운 판본으로 판단된다.
3장에서는 초간본 『불우헌집』과의 대교를 통해 필사본 『불우헌유고』의 특성을 파악하였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필사본 『불우헌유고』에 〈상춘곡〉이 수록되지 않았다. 초간본 『불우헌집』에는 ‘歌曲’이라는 항목에 〈不憂軒歌〉, 〈不憂軒曲〉, 〈賞春曲〉이 수록되어 있다. 반면에 필사본 『불우헌유고』에는 별도의 항목 구분 없이 권두(卷頭)에 〈不憂軒曲〉과 〈不憂軒短歌二章〉만 두었다. 또 필사본 『불우헌유고』는 모두 이두(吏讀)로 표기로 되어 있는 반면에 초간본 『불우헌집』에는 〈불우헌곡〉은 이두, 〈불우헌가〉와 〈상춘곡〉은 18세기 근세 국어로 표기되어 있다.
둘째, 산문의 경우 초간본 『불우헌집』에 일실된 대목을 필사본 『불우헌유고』는 온전하게 갖추고 있다. 초간본 『불우헌집』의 〈又陳弊疏〉에는 ‘공법(貢法)에서 토지의 품등에 대한 폐단’과 ‘도적을 다스리는 법이 너그러운 폐단’을 논한 항목의 일부가 일실되었고 ‘이하의 글은 일실되었다(此下逸)’고 별도로 주석이 붙어 있는데 필사본 『불우헌유고』에는 이 대목이 모두 나온다.
셋째, 한시는 필사본 『불우헌유고』에는 83제 156수, 초간본에는 54제 92수가 수록되어 있다. 필사본 『불우헌유고』에는 초간본에 수록된 작품이 모두 포함되었을 뿐만 아니라 29제 64수가 더 실려 있다. 정극인 작품은 필사본 『불우헌유고』에 60제 106수, 초간본에 36제 58수가 수록되어 있다. 필사본 『불우헌유고』에 24제 48수가 더 많다. 필사본 『불우헌유고』에 새로 등장한 시제 대부분이 정극인 작품이다. 이와 함께 초간본 『불우헌집』과 필사본 『불우헌유고』에 동시에 수록된 작품들을 비교해보면 같은 시제인데도 불구하고 초간본 『불우헌집』에 수록된 작품의 분량이 적은 경우가 적지 않다.
이상의 대교 결과 필사본 『불우헌유고』와 초간본 『불우헌집』 간의 차이가 상당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필사본 『불우헌유고』는 초간본 『불우헌집』에 일실된 내용을 온전하게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작품 수나 분량도 훨씬 많다. 이에 본고에서는 필사본 『불우헌유고』를 황윤석이 행장에서 언급한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유실되기 이전의 판본으로 보았다.
4장에서는 〈상춘곡〉의 작자 문제에 대해 재론하였다. 우리가 필사본 『불우헌유고』를 통해 확인한 분명한 사실은 〈상춘곡〉이 애초 정극인의 유고에는 들어있지 않았고 초간본 『불우헌집』을 간행하면서 문집에 포함되었다는 점이다. 본고에서는 그 이유를 다각도로 분석하여 정극인이 〈상춘곡〉을 지었을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상춘곡〉은 후대에 집안 자제나 향리의 누군가가 지은 작품으로 여기에 치사한 후 태인에서 강학에 힘쓰며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추구했던 정극인의 만년의 삶을 중첩하여 그의 작품으로 탈바꿈시키고 작품의 권위를 부여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후 향리를 중심으로 정극인소작으로 널리 유통되었고 문집에까지 포함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