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식은 한국 독립운동가 가운데 최초로 몽골 땅을 밟아 독립활동을 모색한 인물로서 1914년 가을 비밀리 군관학교를 세울 계획으로 한인 청년들과 함께 몽골로 향했다. 이후 자금 문제로 그의 계획이 실행되지 못하였지만, 김규식은 몽골에 남아 몽골에 진출해 있던 미국의 무역회사에 근무하며 한국 독립운동의 새로운 외교적 방안을 모색해갔다. 학자형 독립운동가였던 김규식이 독립운동 초기 중국과 몽골을 오가며 무역업에 종사한 사실은 매우 이례적인 행보이지만, 무역업을 통해 김규식은 생계와 독립자금을 해결하는 동시에 외국 무역회사의 네트워크를 활용해 한인 인사들과 긴밀히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 후 김규식이 몽골을 다시 찾은 것은 1918년으로 당시 사촌동생 김은식과 큰아들 김진동이 함께 했다. 김규식의 소개로 이태준은 김은식과 결혼한 후 1919년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 참석 경비를 지원해줄 정도로 김규식과의 긴밀한 관계를 이어갔다.
마지막으로 김규식이 몽골을 방문한 것은 1921년 겨울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이다. 당시 김규식은 몽골 혁명지도자 린치노의 부인인 한인2세 남마리아를 만나 러시아로 가는 교통 편의를 제공받았다. 하지만 1925년 린치노가 소련으로 소환되자 이후 김규식을 비롯한 한인 인사들의 몽골행도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한국 독립운동을 기반으로 포문을 연 20세기 초 한몽 교류도 단절되고 말았다.
독립운동 초기 김규식은 독립운동의 새로운 근거지이자 삶의 터전으로 몽골을 주목하였지만, 이후 몽골에서의 한국 독립운동은 몽골 교통·통신의 어려움과 함께 상호 연대의 필요성이 약했다는 한계점을 가지며 지속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규식이 한국 독립운동의 새로운 근거지로 몽골로 시선을 돌릴 수 있었던 데에는 일제의 감시가 덜한 몽골에서 독립 자금과 독립운동 인재를 준비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