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태평양전쟁기 미국유학생 임창영의 독립운동과 전후 재건 방안의 특징을 살폈다. 미국유학은 임창영의 인생에서 일대 변곡점이었다. 1930년 3월 평양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한 그는 학교 교장이었던 조지 새년 맥큔의 도움을 받아 미국유학을 갈 수 있었다. 9월부터 펜실베니아주 이스톤에 소재한 라파엣대학에서 신학을 배웠다. 1941년에는 프린스턴대학교 정치과에 진학하였으며, 1943년과 1946년에 정치학 석사, 박사를 받았다.
임창영은 한국의 독립을 위해 뛰었다. 1937년 9월 뉴욕에서 중국후원회에서 상무위원으로 미국 연방정부를 대상으로 對韓 무기원조, 미국에 거주하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일화배척을 주장했다. 그리고 중국에서 일본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인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했다. 1942년 워싱턴 D.C.에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 참여했다. 여기서 미국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환기시켰다. 임창영은 1944년 5월부터 주미외교위원부가 한국 독립과 전후 국가건설을 준비하고자 협찬회를 조직하자 교육부장을 맡았다. 그가 교육부장을 맡은 것은 이후 전개할 미국유학 청원 활동과 연관있는 것이다.
임창영은 1944년 10월 ‘한인교육재단’을 만들었다. 미 연방정부는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요구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이에 방향을 돌려 독립이후 한국 재건에 필요한 전문인력 양성 방안에 관심을 돌렸다. 전후 한국에 필요한 과학자, 기술자 등을 미국에서 양성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한인교육재단을 설립했다. 미국에 유학 중인 한인 학생, 미주한인 1.5, 2세대들을 대상을 미국 고등교육기관에서 전문분야 훈련을 시켜야 하며, 여기에 필요한 비용은 연방정부가 제공해 줄 것을 요청했다. 미 연방정부는 예산부족의 이유로 임창영의 요청을 거절했다. 임창영의 구상은 실천되지 못했지만, 해방 전후 다수 인사들이 독립에만 관심을 보이고 있을 때 독립 이후 한국 재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전문인력 양성을 구상하고 준비했다는 것은 분명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