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부터 1936년까지 연속간행물에 실린 딩링 관련 언급은 주로 딩링 실종사건에 관한 것이며 이 사건을 계기로 국공양당의 여론 대결이 벌어졌다. 이번 여론 대결은 국민당의 공신력 훼손과 좌익 문인에 대한 비밀처형, 언론 봉쇄 등 ‘전과'로 인해 초반부터 대결에서 불리한 위치에 처하였다. 또한 국민당은 딩링의 스캔들을 조작하는데 주력했지만 공산당은 딩링의 작품이나 생애에 대한 전문적인 평가 글을 발표한 것을 통하여 딩링의 혁명적 여걸 이미지를 구축하였다. 딩링은 작품 활동 초기부터 자신의 작품과 상관없이 과대평가되거나 과소평가되었으며, 본고는 국공양당의 경합 속에서 형성된 딩링 언론에 나타난 딩링 이미지 구축을 통하여 이것의 이유를 고찰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