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자본주의는 이전의 신분주의를 대체했으며, 자본은 신분에 버금가는 위치에 올라섰다. 기능에 따른 분업이 신분을 대체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자본이 이내 신분이 차지했던 위치에 올라섬으로써 기능에 따른 분업은 그 종속변수가 되었다. 신분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의 변화에서 필자는 애덤 스미스의 분업론이 성공하고 뒤르켐의 분업론이 실패한 이유를 찾는다.
현대사회로 갈수록 ‘기능’은 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신분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의 변화 속에서 기능은 그야말로 제 기능을 발휘하는 것처럼 보였다. 신분이 기능으로 대체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자본주의는 신분사회의 틀을 벗어났고, 기능은 신분에 종속되는 것에서 해방되었다. 자본의 힘은 신분의 힘을 이겼다. 하지만 자본 스스로 신분이 되고 있다. 자본은 새로운 신분이 되어 기능을 종속시킨다. 신분에서 해방된 경제는 진정한 개인의 시대를 열 것으로 기대했지만, 개인은 이내 자본에 종속되었다. 현대사회로 갈수록 ‘기능’이 중요시되나, 그 내면에는 자본의 논리가 내재해 있다. 진정한 기능 우위라고 보기 어렵다. 진정한 기능적 분화라고 보기 어렵다.
필자는 자본의 영향력을 경제체계에 제한하고, 정치, 학문, 예술 등 다른 기능체계에 미치는 자본의 영향력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사회이론을 규범화할 것을 주문한다. ‘기능적 분화’를 규범적 개념으로 삼았다는 것은 기능적 분화가 ‘자본주의의 총체성’에 의해 현실에서는 제대로 실현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필자는 ‘규범적 과제로서 기능적 분화’를 주장하면서, 사회 연대를 지향하는 체계의 분화도 주장한다.
여기서 두 가지 점을 언급해야 하는데, 첫째는 ‘규범적 과제로서 기능적 분화’를 이끌어낸다고 해도, 이것만으로 사회 연대 효과가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실 ‘규범적 과제로서 기능적 분화’를 이끌어내는 것은 매우 어려운 과제임에 틀림없다. ‘규범적 과제로서 기능적 분화’는 ‘자본주의의 총체성’의 해체를 목표하기 때문이다.
둘째, 그렇기에 ‘규범적 과제로서 기능적 분화’를 설정하는 것 외에도, 사회 연대를 지향하는 여러 장치들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인간존엄, 인권의 규범적 언어가 여전히 유효하며, 사회 연대를 주장하는 인간의 목소리가 높아져야 한다. 인간존엄과 인권이 침해되고, 사회 연대를 체계 내에서 기대하기 어려운 곳에는 사회적 약자의 인정투쟁이 중요하다.
필자는 ‘규범적 개념/규범적 과제로서 기능적 분화’를 주장하지만, 이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필자는 사회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현대사회에서는 어떤 해결책도 ‘기능적 분화’를 도외시할 수 없으며, ‘기능적 분화’를 사실적 개념을 넘어 규범적 개념으로 설정해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럼에도 ‘기능적 분화’로 포섭할 수 없는 영역이 분명 존재하며, 이는 인간존엄, 인권, 인정투쟁과 같은 개념들이 우리의 규범적 파토스에 강력한 효력을 발휘함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