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국보 제239호인 〈송시열 초상〉에 대한 미술사적 연구의 가장 큰 쟁점인 제작 시기의 문제를 새로운 방법으로 연구하여 19세기 초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한 것이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송시열의 화상자경(畵像自警) 관서(款書)에 근거하여 17세기 중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기도 하고, 정조 어제의 관서에 근거하여 18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기도 했으며, 평면적이고 고졸한 화법에 근거하여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기도 했다. 그러나 국보본의 관서는 송시열과 그의 초상화를 이상화시키기 위해 역사적 사실과 다른 가상의 내용을 가탁(假託)해 넣은 것이고, 용모와 의관도 초기의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모습과 달리 이상화시키고 추상화시킨 모습을 의고적인 평면적 조형으로 특별하게 그린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텍스트 분석이나 양식분석으로는 올바르게 편년하기 어렵다.
본고는 이와 같은 특수성을 고려하여 국보본(國寶本)의 가장 본질적 특징인 ‘이상화’ 개념을 핵심 기준으로 삼은 뒤, 용모나 도상이 유사한 이모작 계열 가운데 나타난 이상화 양상의 단계적 변화 양상을 양식사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을 통해 〈송시열 초상〉이 19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새로운 편년을 시도하였다. 조선 후기에 이모된 송시열 초상은 크게 3단계의 이상화 과정을 보여준다. 1단계인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초반은 도화서 화원에 의한 윤색이 가해졌지만 대체로 초기의 사실적인 모습을 유지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2단계인 18세기 중·후반에는 여러 화가들이 그린 송시열 초상의 장점이 융합되고 얼굴이 귀인의 상처럼 관상학적으로 이상화되어 가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3단계인 19세기 초반에는 이상화가 더욱 진행되어 눈썹이 초승달이나 버들잎처럼 가늘고 부드럽게 휘어지고 귀는 부처님 귀처럼 2배 이상 길어져 이상화가 정점에 달하며 국보본이 그려졌다. 정조 어제를 서사(書寫)한 예서(隸書)의 서풍(書風)이 19세기 초반 양식을 보여 주고 있다. 국보본과 동일한 용모와 도상의 송시열 초상이 19세기 중·후반 이후 이모되기 시작했다. 한편 송시열에 대한 숭배 의식이 18세기 후반에 정점에 달하고 19세기 초까지 그 여맥이 지속되었던 것도 국보본을 19세기 초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는 우리의 추론을 어느 정도 뒷받침해 준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