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에는 ‘불상형 지권인 비로자나불상’과 ‘보관형 지권인 비로자나불상’이 있다. 두 불상 모두 지권인(智拳印)의 손 모양을 하고 있지만, 하나는 몸에 장엄하지 않은 불상형이며, 다른 하나는 머리에 보관을 쓴 보살형이다. 755년 〈신라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 변상도〉는 보관형 비로자나불상이며, 766년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불상형 비로자나불상이다. 두 상은 모두 8세기 중엽에 조성되었으며, 『80권본 화엄경』을 바탕으로 했지만 두 비로자나불상의 도상은 다르다. 거의 동시에 같은 경전을 바탕으로 했지만, 도상에서 확연히 차이가 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 글은 바로 이러한 궁금증에서 시작됐다.
8세기 중엽, 신라 왕경의 화엄학은 크게 연기계(緣起系, 또는 화엄사계)와 표훈계(表訓系, 또는 부석사계)로 나뉜다. 연기(緣起, 8세기 중엽에 활동)가 주로 화엄사, 황룡사를 중심으로 활동했다면, 표훈(表訓, 8세기 중엽에 활동)은 황복사, 불국사가 활동무대였다. 필자는 연기계가 보관형 비로자나불을, 표훈계가 불상형 비로자나불을 조성했다고 생각한다. 중국 승려 법장(法藏, 643-712)의 영향을 받은 연기는 비로자나불상을 조성하면서 중기 밀교 대일여래의 도상인 보관형 지권인 비로자나불을 그대로 빌려 왔다. 그 사례가 바로 황룡사 연기조사가 조성한 755년 〈신라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 변상도〉이다. 반면 표훈계는 연기계와 달랐다. 표훈의 스승 의상(義相, 625-702)은 『화엄경』만을 절대적이고 완전한 가르침으로 파악하고, 실천적 수행을 중시하며 『화엄경』 그 자체에 몰두했다. 이들 가운데 특히 표훈은 왕경에 진출하여 8세기 중엽 이후 왕경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 바로 이러한 표훈을 비롯한 의상의 문도들이 『화엄경』의 주존인 비로자나불상을 조성하면서 중기 밀교 대일여래 도상을 그대로 차용하지 않고, 비로자나불의 핵심인 지권인 수인(手印)만 빌려 와 불상형 지권인 비로자나불이라는 새로운 도상 창안을 시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표훈계는 『화엄경』에 모든 경전의 가르침이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외의 경전을 상대적으로 중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불상형 지권인 비로자나불상은 중국이 아닌 신라에서 창안되었으며, 766년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다 앞서 이미 신라 왕경에서 불상형 비로자나불상을 조성하고 봉안했다고 보았다. 당시 불상형 지권인 비로자나불 도상 창안을 주도했던 이는 바로 당시 왕경에서 주도적으로 활약했던 표훈(계)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