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 회암사지는 많은 온돌 유구를 보유하고 있어, ‘온돌’이라는 소중한 과학문화유산의 역사와 가치를 조명하는 데 있어 큰 자원이 된다. 특히 온돌문화의 발전단계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회암사지 온돌의 조성시기에 관한 연구는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회암사지 온돌의 조성시기를 다룬 연구는 다음과 같다. 이승연은 회암사지 조성시기를 온돌층에서 발굴된 유물과 전면온돌의 구조를 통해 조선시대로 주장하였다. 조원창은 건축고고학적 관점에서 고찰한 결과, 회암사지 영당지의 조성시기를 조선시대로 보았다. 김영재는 회암사는 고려시대에 중창 회암사의 창건연대는 명확하지 않지만, 고려중기 인종 재위 시기(1122~1146)부터 늦어도 1174년(명종 4년) 이전이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회암사는 1372년(공민왕 21년)에 나옹(懶翁) 혜근(惠勤, 1320~1376)에 의해 중창되었다. 그리고 1376년(우왕 2년) 중창 낙성회가 있은 후,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이 1377년 6월에 회암사의 구조와 규모를 담은 「천보산회암사수조기(天寶山檜巖寺修造記)」를 저술하였다고 한다. 정연상은 회암사는 조선 건국 이후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인해 쇠퇴하였다가, 성종대에 이르러 다시 중창 불사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회암사는 결국 양란(兩亂)을 겪으면서 회복할 수 없는 폐허로 남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본 연구에서는 고려말 목은 이색(1328-1396)의 「천보산회암사수조기」의 기록과 건물 배치가 일치한 온돌 유구를 중심으로 그 구조적 특징을 도출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회암사지 온돌의 구조적 특징을 바탕으로 온돌의 조성시기를 조명하고자 한다. 먼저 기존에 널리 알려진 조선시대 조성설을 살펴보고, 일부 온돌의 경우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이라는 새로운 주장을 제시하고자 한다.
본 연구에서는 새로운 ‘고려시대 조성설’을 뒷받침하는 근거로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제시하였다.
첫째, 먼저 이색의 「천보산회암사수조기」의 기록과 배치가 일치하는 건물지의 온돌 유구는 고려시대 이미 조성된 온돌이 계속 유지되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발굴보고서를 통해 확인하였다.
둘째, 고려시대 온돌 유구의 사례를 통해 유사한 전면온돌 방식이 회암사지 온돌 유구에서 사용되었음을 입증하였다.
셋째, 개자리의 구조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정착된 고래개자리가 아닌, 그 이전 단계인 민개자리(개자리가 없는) 또는 둔벙개자리(개자리 부분에만 움푹 파인)의 구조를 지닌 온돌 유구가 발견되었다.
하지만, 본 연구는 「천보산회암사수조기」의 기록과 건물지 배치가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6단지 아래부터의 온돌을 다루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향후 6단지 아래의 온돌이 지닌 구조적 특징을 연구하여 온돌의 변천 단계와 조성 시기를 밝히는 것을 과제로 남기고자 한다. 또한, 이러한 온돌 연구 성과들이 누적되어 소중한 과학문화유산인 온돌문화가 전승되고 발전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