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보선은 개화파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가문이 한국교회 초기의 기독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적 배경 속에서 성장했다.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상해로 건너가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윤보선이 상해에서 활동을 시작했을 때 그가 따랐던 신규식은 그에게 ‘해위(海葦)’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상해의 시기가 그의 생애에서는 4년이라는 짧은 시기였지만 그의 생애 전체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정치인 윤보선의 출발점이었다.
상해에서 윤보선은 이승만계로 분류되었다. 신규식이 가지고 있었던 정치적 위치를 따랐던 이유이기도 했다. 또한 이승만이 가지고 있었던 기독교 민족주의 계보 안에 윤보선이 위치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윤보선은 이승만의 요청을 따라 부친으로부터 독립자금을 모금해 오기도 했다.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했으며 대한적십자사의 모금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윤보선은 상해임시정부가 갈등에 휩싸이기 시작하던 시점에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상해임시정부로 가기 전 윤보선은 자신의 굳은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윤치호로 상징되는 독립협회의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민권의식과 전통질서에 대한 거부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중국의 신해혁명을 지켜보면서 민주공화정에 대한 이상을 품었다. 윤보선은 민주 공화정을 위해 혁명을 해야 하고 이를 통해 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그에게는 배일사상이 분명했다. 윤보선에게 일본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배척의 대상이었다. 윤치호가 가지고 있었던 일본에 대한 인식과 달랐다. 윤치호가 일본의 문명을 통해 일본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면 윤보선은 일본이 아닌 혁명을 통해서 일본을 극복하려 했다.
윤보선은 상해에서 신규식의 민족주의를 경험했다. 민족이 이념보다 위에 있었다. 공산주의를 받아들였던 이동휘를 민족의 지도자로 평가했고,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단군을 민족의 상징으로 이해했다. 윤보선은 민족주의를 통해서 항일독립이라는 목표를 분명히 할 수 있었다. 윤보선의 민족주의는 영국유학을 거치면서 자유민주주의로 발전한다. 윤보선의 민족주의는 민주주의 국가건설을 위한 민족애를 의미했던 것이다.
윤보선의 상해임시정부 참여는 그가 가지고 있었던 배일사상과 민족애의 발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