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이용목은 사대부의 의식과 취향을 지녔으나 갑오개혁 등의 사회 변동을 겪으며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지위를 유지할 수 없었던 인물이다. 이 논문은 이용목이 73세 되던 1898년에 『백석만성가』를 짓게 된 내적 동력을 고찰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이로써 19세기 말 국문시가 창작과 향유의 한 국면을 구체화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백석만성가』에 수록된 18편의 시가는 길어야 22행, 짧으면 5행에 불과하여 가사라 하기도 어렵고 시조라 하기도 어렵다. 이렇듯 어중간한 형태의 국문시가가 산출된 것은 조선 후기에 장르 인식이 옅어져 간 결과일 것이다. 그런데 이용목이 이러한 경향에 발맞춘 동력을 묻는다면 ‘만성/희작’의 태도를 표방하며 내키는 대로 가볍게 지었다고 하면서 당시에 유행한 시조를 수용하거나 시가의 관습적 표현을 활용하되 자신의 처지와 인식을 투사한 것이 눈에 띈다. 곧 이용목이 국문시가를 창작하는 과정은 19세기 말 시가 문화를 향유하는 과정이기도 했는데, 이와 같은 창작 태도가 그 장르 규정을 모호하게 하는 동력이 되었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용목은 『백석만성가』 곳곳에서 자기 자신을 처사로 규정하며 세상과 거리를 둔 채 백운동 주변의 자연에 묻혀 살고자 하는 삶의 자세를 드러낸다. 흥미로운 점은 처사로서의 자기 인식이 치산과 부귀에 대한 비판적 태도와 결부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용목의 현실 비판은 당시의 현실에 기반을 둔 감화와 설득의 전략을 갖추지 못한, 당위적 비판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본인이나 잘해야 한다는 식의 체념과 비탄에 젖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러므로 이용목은 못마땅한 현실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정립하지 못한 채 처사라는 이상적 형상에 기반하여 삶의 근거를 마련하려 한 조선 후기 처사의 한 면모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백석만성가』는 처사를 자처한 이용목이 만년에 느낀 무력감과 고독감을 토로한 시가집이다. 곧 예전과 다른 인심과 세사를 비웃고는 있으나 그것을 어찌할 수 없는 데서 비롯한 무력감과 세상과 거리를 둘수록 늙어서 쇠한 몸, 홀로 남은 처지로 인해 깊어졌을 고독감을 노래했다는 것이다. 이용목에게 국문시가는 여전히 시여로서 그 시름을 푸는 창구가 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렇듯 무력하고 고독하게 혼란한 세월을 견뎌야 했던 이용목이 내키는 대로 가볍게 창작에 임하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낸 것은 시가의 가창과 연행이 활발해지고 가집의 편찬과 보급이 활성화된 19세기 말의 문화적 토대에 기반을 둔다. 따라서 백석 이용목의 『백석만성가』는 전근대의 시가 양식이 1898년까지 지속, 변모한 하나의 국면과 당시의 문화적 기반이 국문시가의 창작과 향유에 미친 영향을 구체화하는 단서를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