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 山東省 靑島는 1910년 신민회 주요 회원들이 모여 향후 해외 독립운동의 방향을 설정하기 위해 가진 ‘청도회의’가 열린 장소이자 짧은 시간이나마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했던 장소로서 큰 의미를 갖고 있는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가들의 회합 시기나 청도에서의 활동거점과 장소 등에 대한 구체적 사실들은 그간 확인되지 못했다. 본 연구는 독립운동가들이 고국을 떠난 시기부터 청도에 도착해서 활동거점을 확보하여 활동한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난 시기까지의 행로를 추적하여 ‘청도회의’가 열린 시기를 확인하고 청도가 해외 독립운동의 활동 장소로서 의미가 있음을 밝히고자 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의사의 이토히로부미 살해사건 이후 연루자로 의심받아 투옥되었던 독립운동가들이 1910년 2월 19일 석방되고 나서 일본의 청년내각 제의를 거부하고 망명을 떠난 것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벗어난 3월 27일경이며, 당초 회합하기로 한 장소를 북경에서 청도로 옮긴 것은 4월 1일 宣統帝 溥儀를 섭정하던 醇親王 암살사건 기도가 발각되어 북경지역의 경계와 감시가 심해졌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독일의 황제 빌헬름2세는 동아시아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정책을 부정적으로 파악했고 이에 대항해야한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독일이 租借地로 삼고 있던 膠州灣 靑島가 독립운동 활동에 적절한 대안의 장소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일정과 경로를 달리한 독립운동가들이 청도에 도착한 시기는 4월 중순경 이갑 일행으로부터 시작해 안창호 일행이 도착한 5월 초순경이다. 따라서, ‘청도회의’가 열린 시기는 그간 알려진 4월이나 7월이 아닌 모든 참석자들이 모이게 된 5월 초에서 이갑이 상해를 방문하기 이전인 6월 중순 사이의 기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또한, 그간 확인되지 못하던 ‘청도회의’ 장소는 ‘메트로폴호텔(Hotel Metropole)’로 독립운동가들이 활동거점으로 삼았던 곳이다. 독립운동가들의 활동 중 신문 잡지 발행계획은 구체적이고 지속적이었다. 결국 총독부의 허가를 받지는 못했지만 福昌书局(Deutsch-Chinesische Druckerei u. Verlagsanstalt)이라는 인쇄소까지 교섭하여 The Gospel in Korea라는 이름으로 정식 허가 신청까지 진행한 독립운동가들의 중요 활동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이 청도에서 활동거점으로 삼았던 ‘메트로폴호텔(Hotel Metropole)’이나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선교사를 통해 접촉한 보스캠프목사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독일총독과의 만남으로부터 해외에서 일본의 무모한 야심을 세계에 알리고자 기획한 항일 신문잡지의 발간 추진과 향후 해외에서의 활동을 위한 어학 교육을 받았던 학교 등의 공간은 현재 거의 모두 흔적을 잃어버렸거나 터만 남아있다. 하지만 당시의 도시구조와 근대건축물들이 여전히 많이 남아있는 청도는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힘써 활동했던 장소로서 의미를 느끼기에 충분한 곳이다. 한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청도는 관광지로서 널리 알려져 있으나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하던 곳이라는 것을 아는 이는 드물다. ‘靑島’는 해외독립운동 활동장소 중 하나이자 향후 해외독립운동 전략과 구체적 실행 논의를 이어나게 한 ‘청도회의’가 열린 장소로서 큰 의미를 갖고 있는 곳이다.